|
QT(Quentin Tarantino감독의 애칭)는 변했다. 쿨하게. 영화 <재키 브라운>을 찍은 후 6년간 QT(묵상:Quite Time)를 하고 나온 네 번째 작품이 <킬 빌 Vol 1(Kill Bill: Volume 1)>(이하 <킬 빌>로 표기)이다. 이 영화는 6년 만에 나타난 그가 쿵후와 사무라이 액션에 바치는 오마쥬이다. 줄거리는 과거 악명 높은 갱단원이었던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살해를 명령한 보스이자 남편 빌에게 결혼식 날 살해당할 뻔 하고, 5년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복수 리스트를 작성하고 차례로 단원들을 죽인다는 복수극이다.
이 영화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버린 것은 컬트적 요소와 작가주의적인 면이다. 감독들 중 영화 네 편으로 이름을 내는 감독은 드물다. 그는 <킬 빌>을 찍을 때 미라맥스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았다. 미라맥스를 먹여 살려준 작품인 <펄프 픽션>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를 컬트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해준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 픽션>에서 보여주는 컬트적 요소였다.
이 영화는 나처럼 과거의 그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컬트팬이라면 재미는 있지만 유감일지 모르겠다. <저수지의 개들>을 보며 ‘갱 영화라더니 총격씬도 별로고 뭐 이런 개같은 영화가 다 있어’라고 머리 아파 했던 팬들은 과거의 그를 전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 영화는 달라진 쿠엔틴 타란티노식 <매트릭스>의 중국, 일본 버전이다.
|
영화관을 나와서 주차장으로 바로 가지 못했다. 과거의 그가 그리웠다. 서성거리다가 속으로 그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로 렘베르크로 가면서 왜 나한테 네가 렘베르크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 거니...'
너에게 오마쥬를 날려~
|
가끔 나는 존경 받는 인물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존경스럽게 보일 때가 많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오마쥬를 날린 이를 보면 지금의 <킬 빌>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이 영화만의 매력이 무언지 알 수 있다.
그는 <영웅본색> 등 홍콩 느와르의 대부인 오우삼에게 오마쥬를 날렸다. 아예 <중경삼림>의 왕가위 감독을 미국에 소개했고, <중경삼림>의 미국판 DVD앞에는 ‘아, 이 감독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너무도 근사합니다. 여러분이 절대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제가 반했거든요’라는 감독을 향한 찬사를 날리는 오마쥬가 담겨져 있다. 그가 날린 오마쥬로 인해 할리우드와 사람들은 두 감독을 알게 되었고, 두 감독은 미국 내에 알려지면서 할리우드로 입성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그들의 영화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 쿠엔틴 타란티노가 ‘오늘 들어온 신작인데 끝내줘요~’하며 비디오 점원일 때 오마쥬를 날리던 감독들이었다. 70,80년대에 미국에 홍콩 느와르 필름이 수입되었고, 조잡하고 줄이 뻑뻑간 B급 영화 테이프였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컬트영화처럼 쿨했다.
|
쿠엔틴 타란티노가 오마쥬를 날리는 이는 〈라쇼몬(羅生門,1950),〈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1954)>,〈가게무샤(影武者,1980)〉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다. 이중 <7인의 사무라이>는 와이드 앵글과 딥 포커스를 이용하여 사무라이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던 구로사와 감독의 명작이다.
<킬 빌>에는 사무라이 액션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야쿠자의 여두목인 오렌 이시(루시 리우)와 브라이드(우마 서먼)와의 결투씬이 하얀 눈 위에서 펼쳐진다.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리게 했던 흑백의 화면을 통해 영상미를 보여주는 우마 서먼과 야쿠자 조직과의 사무라이식 검싸움도 아름답다. 타란티노가 과거와 달리 <킬 빌>에서는 뛰어난 미장센을 보여준다. 이 멋진 장면들은 올리버 스톤의 마에스터 촬영 감독인 로버트 리차드슨이 담았다.
<킬 빌>은 사운드가 뛰어나다. <킬 빌>을 뛰어난 영화로 만드는 또 한 요소다. 백지 수표가 좋긴 좋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음악인은 다 모았다.
사운드 면에서 스릴러 영화는 여자의 목소리가 많이 나올수록 긴장감이 늘어난다. <킬 빌>은 여자들이 많이 나온다. 영화 중 살인 명령을 보내는 보스 빌을 목소리만으로 처리하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만의 멋진 기법이다. 가장 무서운 스릴러 영화 속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이니까. 그 살인자가 첫 장면처럼 피범벅인 우마 서먼의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은 범죄 영화의 단골 장면이다. 갱단의 보스가 나타날 때 괜히 고양이를 품에 앉고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음향효과인 불안감을 주는 ‘왱~~~왱’모기 소리나(파리인지 모기인지 갑자기 헷갈린다), 줄여지고 낮은 음의 대사는 스릴러 영화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전달해준다.
|
비디오 대여점 점원이었던 타란티노는 주로 B급 영화인 컬트 호러와 홍콩 느와르물, 사무라이 액션 영화를 즐기면서 지금의 그를 만들어갔다. 7,80년대 유럽 고어 필름의 역사를 열었던 마에스터들은 루치오 풀치(Lucio Fulci) 감독, 마리오 바바(Mario Bava)감독, 움베르토 렌치(Umberto Lenzi)감독,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감독, 제스 프랑코(Jess Franco)감독이 그들이다. 이들의 비디오를 보고 반해서 맥을 이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있고 리처드 스탠리,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있다. 컬트 감독인 팀 버튼은 주말이면 피가 낭자한 <절대 죽을 수 없는 괴물>시리즈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혹성탈출>,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나왔다.
영화관 앞에서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는 뜻의 한자 성어가 떠올랐다. 색깔로 치면 컬트 영화는 검은 색이다. 음악은 고딕이다. 가까이 접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영화뿐 아니라 사는 것도 같다. 주변에 향기가 나는 사람이나 대상과 가까이 할 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된다.
잔인하다는 것을 썰어 볼까
|
심리적인 호러물은 이상하게 보고 나면 슬퍼진다. 그래도 다중 인격자나 연쇄 살인범이 나오는 슬래쉬 무비를 좋아한다. 아무튼 줄창 보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느새 풀린다. 이번 주에도 무지 우울해서 공포영화만 봤다. 그동안 본 영화 속에서 죽어나간 시체는 원래 목표인 하루 천명씩 계산해서 약 삼천명 정도 될 줄 알았는데 천명 정도 되는 것 같고, 죽는 방법도 역시 가지가지다. 공포 영화는 죽는 방법에 따라 장르가 달라진다.
제일 단순한 괴물이나 사람에게 심장이나 거시기를 뜯어먹히거나 내장이 꺼내지면서 피바다가 연출되는 고어 무비가 있고, 단골 연장인 전기톱, 도끼, 칼등으로 아예 내장이나 뇌가 썰리거나 절단되며 죽는 스플레터 무비가 있다. 피가 쏟아지는 양은 고어보다 스플레터가 압권이다. 제정신 아닌 다중 인격자 살인범한테 이유 없이 역시 단골 연장 기구인 야구 방망이, 칼, 망치 등으로 절단 대신 주인공이 찍히는 슬래쉬 무비가 있다. 찍히니까 피가 튄다. 튀는 피를 질리게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피가 덜 나오는, 내가 잘 보는 오컬트 장르도 있다. 연장이 필요 없이 사탄이니까 그냥 쳐다만 봐도 인간들이 풀썩 죽어버린다. 피가 확실히 덜 나온다. 사실 공포 영화는 잔인한 것보다 피가 덜 나오고 인간들의 수가 적어야 무섭다. 공포물에 에로티시즘을 넣은 시체의 뇌를 톱으로 자르더니 자위하거나 시체를 너무 사랑해서 갖고 도망쳐버리는 네크로 필리아(시체애호증)물이나 포르노를 찍다가 실제로 죽여버리는 스너프 무비도 있다.
이 두 장르는 무서워서 죽이는 것보다 몸을 날려 죽이는데 관심이 매우 크다. 인간은 다양해서 가장 잔인할 때 가장 지쳤을 때 발정나기도 한단다.
<킬 빌>은 전기톱으로 썰어 바비큐를 만들어 먹는 것보단 그냥 칼로 깔끔하게 베어버린다. 백 여명의 야쿠자들이 머리 잘리고 팔 잘려서 피바다 속에서 논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스파게티 호러물을 만드는 감독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스파게티 호러는 70년대 이후 이탈리아 공포영화를 말하며, 쿠엔틴 타란티노가 죽이는 방법에 있어서 그의 이탈리아 스승들을 잘 답습하여 깔끔하게 절단해 버리는 21세기의 스플레터 무비 방식을 택해서이다. 그런데 너무 깔끔하면 잔인한 게 아니라 쿨하다. 그래서 <킬 빌>은 백 명이 잘리든 이 백명이 잘리든 잔인하기보다는 폼나고 시원하다.
왜 이런 쓰레기 영화를 보냐고?
|
‘나는 너를 사랑해’의 충동이 커지면 ‘너만 사랑할래’란 강박이 오고 ‘너도 나를 사랑하는구나’란 망상이 온다. 그런데 상대가 내 맘과 다르면 인간은 똑똑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너는 나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절대 너를 사랑하지 않겠어’란 강박이 온다. 그러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에서 더 나아가 ‘나는 나만 사랑해’ 단계가 오면 과대망상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네가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죽여버린다’는 망상의 단계를 노닌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이러한 과대망상을 가진 주인공이 지그재그 스토리 안에서 오밀조밀 숨어있었다.
‘너를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했어.’ 이건 멜로다. ‘탕~! 어, 미안해 잘못 죽였어. 니가 아냐.’ 이러면 코미디다. ‘넌 어차피 죽어야 될 악당이야. 폼나게 죽여주지.’ 이건 액션이다. 스릴러는 마지막 단계다. 대부분의 저예산 스릴러는 화면도 조잡하고 듣도 보도 못한 주인공이 나와서 죽어가고, 이해도 못할 괴상한 스토리라 쓰레기도 많지만 그 안에 보석이 있기도 하다.
마지막 과대망상의 단계까지 아무나 누구나 가지 않는다. 대부분 인간들은 힘드니까 현실에서 죽고 싶거나 죽이고 싶지만 못 죽고 못 죽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란 망상보다는 대체물인 아무나 사랑해 버린다. 어차피 왜 과대망상을 갖고 어떻게 저렇게 되버렸냐는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랑을 좋아하지 애증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 다는 호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호러나 컬트 영화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인생에서 터널처럼 그게 돈이든 권력이든 사랑이든 섹스든지 과대망상증의 터널을 통과할 때 그때 보면 딱인 영화가 호러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본 호러 영화중 가장 잔혹한 호러 영화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