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적비연수]의 테마는 분명 역사, 민족 혹은 운명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일 게다.
단/적/비/연/수 다섯 사람은 모두 각기 다른, 그러나 가슴 아픈 사랑을 한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을 외치는 단, 사랑을 소유라고 생각하는 적 그리고 그 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지만 단만을 사랑하는 비, 그리고 적을 사랑하는 연. 영화 안의 비중이 가장 적었던 수의 사랑에 대해서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수는 자신의 부족에 대한 사랑과 개인적인 사랑 사이의 번뇌 속에서 자신의 딸인 비를 버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비는 그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게 그들 다섯 사람의 사랑은 엇갈리면서도 기묘한 평행선을 긋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강제규 감독과 나 사이에도 그들 다섯의 사랑처럼 끝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가 만들어 낸 영화들 사이에서 보여지는 기묘한 불쾌감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 이외의 다른 사업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를 보면서 영화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좁혀질 수 없는 사상 차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영화 안의 모든 요소들이 이상하게 '튀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 '튄다'는 뜻은 개성있다는 뜻이 아니라 앙상블이 깨져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의 주제는 하늘에 의해 거부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왜 거부되어야만 하는지, 왜 적은 비를 사랑하고, 연은 적을 사랑하고, 단과 비는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하는 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의 기초가 되어야 할 그들의 애정관계에 대한 디테일은 하나도 살아나지 못한 채, 이 영화는 갈등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후반부로 바쁘게 이동할 뿐이다. 초반의 십 몇 년은 휙휙 지나가서 너무나 짧고, 후반의 단 며칠은 영화관에서 불을 켜고 시계를 들여봐야 할 정도로 지루하고 길다. 그 둘 사이의 깨어진 균형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너무나 지치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의 오프닝에 뜨는 몇 줄 글자로 이 영화 주인공들의 행동동기를 만들어내는 몇 천년의 역사는 생략 되어지고, 그걸 말로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은 듣기에도 힘겨운 대사들을 내뱉기 바쁘다. 비가 화산족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산에서 추락한 단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영화는 단 몇 마디 말이 전부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연이 화산족의 공주라는 사실은 성인식이 있던 다음에나 알려지고, 심지어 어린 시절의 단과 적의 얼굴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는 무조건 후반부로만 치닫기 급급하다. 45억이라는 제작비가 웅변하듯이 이 영화가 사활을 걸었던 것은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가 아니라 액션모험활극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이국적인 풍광과 액션의 호쾌함과 강렬함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하지만 그 미덕은 연출의 한계에 부딪혀서 계속 늘어진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액션이 머리 아플 정도로 많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편집 미숙을 탓할 수밖에는 없는 문제다. (감독이 나타나야 할 시사회장에 후반작업을 이유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작업을 몇 일 더 한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운명에 의해 희생된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다섯 명의 캐릭터 모두가 부족이라는 공동체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운명의 가혹함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 영화는 공간과 시간을 이름 모를 어느 민족의 선사시대로 이동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배경설정 안 에서도 너무나 '튄다'는 느낌을 또 한 번 받아야했다. 배경만이 과거일 뿐 모든 것은 현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적인 대사들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 받는다. 입은 옷과 머리 스타일, 장신구 또한 너무나 화려하다.
게다가 연기까지도 튄다. 김석훈과 최진실은 단과 비를 너무나 표면적으로 연기하고 김윤진의 연은 영화에서 너무나 겉돈다. 설경구의 내면 연기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앙상블 연기는 너무나 어색하다. (아마도 [박하사탕] 때의 혼자하던 버릇이 남아서 그런가 보다. ^^;;;) 게다가 이들 네 '청춘'은 너무나 열혈적으로 연기하는데, (속된 말로 '오바'를 한다, 그거다.) 수 역할의 김미숙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냉기가 뚝뚝 흘러 떨어진다. 한 편은 너무 뜨겁고, 다른 한 편은 너무 차가워서 관객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를 모른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왜 이 영화가 [은행나무침대 2]인지가 드러난다. 단은 [은행나무침대]의 궁중악사 종문의 다른 이름이고, 적은 황장군의 다른 이름, 비는 미단공주의 다른 이름 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들을 웃음바다로 만든 은행나무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부족을 위해 사랑하는 적을 쏘는 연은 [쉬리]에서 한석규가 맡았던 유중길의 다른 이름이며 끝까지 부족을 위해 장렬하게 죽어가는 수는 최민식이 맡았던 이무영의 다른 이름임도 암시한다. 메타포가 은유적이어야 함을 강제규 감독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어디선가 [은행나무침대] + [쉬리] = [단적비연수]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려온다. 만약 전자의 문제라면 어서 가서 문학공부부터 시작할 일이고(^^;;;), 후자의 문제라면 그는 당장 창작작업에서는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요즘은 배급만 얌전히 하고 연출은 꿈도 안 꾸는 강우석 감독처럼 되는 것도 좋겠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를 한 꺼번에 드러낸다. 기본 서사조차 잡아주지 못하는 편집, 그리고 상상력과 스토리의 빈곤(최근 [리베라 메]라는 영화와 [싸이렌]이라는 화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동시에 개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이냐!)까지.
이 영화는 분명 판타지 멜로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그 안의 리얼리티를 살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단적비연수]라는 영화 안의 판타지는 단지 판타지로서만 존재 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과는 분명 별개지만 극 안의 리얼리티를 살렸던 [공동경비구역 JSA]는 이 영화와는 판이한 변별점을 보여준다. 사실 나는 [단적비연수]에게도 그런 기대를 걸었었다. 그리고 그건 최근의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좀 더 길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그에 비례한 실망감이 더욱 커지는 법인지... 이렇게 씁쓸한 기분 한 구석에 '그래도 서울관객 100만은 들 것 같다'라는 평가가 오늘의 나를 더욱 더 초라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