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개그맨의 말대로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없다. 좋은 사람들은 그저 좋은 사람들일 뿐. 만사를 이렇게 편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메이>의 주인공 메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 못하고 결국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다.
<메이>는 시체스 공포영화제(이름도 공포스럽다. 하필이면 시체란 말이냐) 수상작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단관 개봉했을 뿐이다. 사실 별 흥행 요소가 없는 영화였던 것은 사실. 눈에 띄는 스타도 없으며 영화 자체의 감수성이 특이하다. 공포영화지만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경향에서는 살짝 비켜나 있다. 한 마디로 좀 비틀린 영화인 셈이다. 그러나 <메이>는 사람을 예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같은 공포영화라도 사람들 둔감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예민하게 감각과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은 별로 불쾌하지 않다. 메이가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는 것은 비단 살인 장면이 거의 영화 말미에 이르러서야 등장하기 때문인 것 만은 아니다.
<메이>에서 공포는 친구들의 육체를 이용하여 진짜 친구를 만들려는 메이의 희망, 그리고 그 행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행위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메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부분은 아름답지만 전체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의 말은 아름다운 육체의 파편을 모아 아름다운 인간을 만들려는 메이의 헛된 희망을 꿰뚫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메이의 피조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니까. 메이의 희망이 헛되다는 것과 아울러 메이가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고 마는 이유가 그녀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도 비극의 근원이 된다. 메이는 처음 사귄 남자친구 아담의 영화에 나오는 행위를 그대로 재현한다. 공포영화 팬인 아담은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상대를 물어뜯는 연인의 기괴한 로맨스를 그려내고, 메이는 아담의 입술을 물어뜯어 피를 낸다. 좋아하는 남자와 식사를 같이 하면서 자신의 직업(그녀는 동물병원에 근무한다)과 관련된 끔찍한 에피소드를 웃으며 늘어놓거나 인형에게 화풀이를 하는 그녀의 무신경하고 기이한 모습을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폴리와의 에피소드도 인간관계에 무지했던 결국 그녀가 얻을 수 있는 당연한 결말인 셈이다. 메이에게 변명거리가 있다면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몰랐다는 것. 관계의 실패는 현대의 가장 비극적인 질병이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이기도 하다.
메이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슬픈 영화이다.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메이가 만든 인형이 그녀를 쓰다듬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작은 위안과 아울러 공포를 준다. 메이의 인형 수지가 담긴 유리관이 부서지면서 산산이 흩어진 유리 조각에 메이와 아이들이 부상당하는 장면은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