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자막이 올라 갈 때쯤이면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에서 아무 연관 없이 나온 음식이 갑자기 먹고 싶어진다거나, 담배 한 모금이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사람 많은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니고 싶게 만드는 영화도 있다. 그러한 일련의 생각과 행동들은 세월이 흘러 영화의 내용이 뇌리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이해나 평가를 대신해 기억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옆에 있는 그 누군가를 힘껏 껴안고 싶게 만든다. 아무 말도 필요 없이 눈빛만으로 나의 고통을, 너의 외로움을 그저 공감하고 어루만져 주고픈 그런 느낌 말이다.
치매 노모를 보살피며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닥터 키너, 마지막 임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를 애써 외면하며 유부남의 아이를 낙태하기로 결심한 레베카, 더 이상 엄마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들과 단둘이 사는 로즈, 병마와 싸우는 연인을 지켜보아야 하는 레즈비언 크리스틴, 자살한 동창의 시신을 조사하는 형사 캐시, 그리고 그녀의 앞 못 보는 동생 캐롤. 그들은 각기 다른 사연 속에 놓여 있지만, 눈빛만은 한결 같이 허허롭기만 하다.
캐롤이 죽은 카르맨의 사연을 본인의 상황에 대입해 유추해 냈듯이,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는 행복도 잠시, 서로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누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 갔을 것이라고. 피의 빛깔이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캐롤처럼 보지 않고서도.... 영화 속의 다섯 가지 에피소드는 얼핏 독립적으로 구성된 것 같지만, 각기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다. 닥터 키너의 불행한 점괘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크리스틴은 그 보다 덜할 것도 없는 고통 속에 처해 있으며, 레베카의 절망적인 낙태 장면엔 기다림에 지친 닥터 키너가 함께 한다. 그리고 이들의 사이를 유영하듯 흘러 다니는 무표정의 '그녀'(!)가 있다. 로버트 알트만이 <숏 컷>에서 이미 시도한 바 있는, 이제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형식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적절히, 절절히, 절실히 직조된 영화는 익히 없었다고 말해버리련다.
일상 속에서 수도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너무나 깊어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로만 시선이 꽂히는 잿빛 눈빛을 가진 그녀들의 사연과, 그것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구구절절 풀어놓고 따지기엔 너무 많은 지면이 필요하거나, 혹은 한 줄의 글도 사족이다. 그저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순간 누군가의 눈빛이 떠오르거나, 혹은 껴안고 싶은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하다면 이 글은 비로소 소임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위에 나열한 허접 겉 핥기식 줄거리가 당신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했다 해도, 글렌 클로즈, 홀리 헌터, 칼리스타 플록하트, 카메론 디아즈가 건네는 지친 손은, 아마도 웬만해선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그들의 연기야 두말하면 잔소리일 테고, 한 영화 속에서 이 쟁쟁한 배우-스타가 아닌-들을 모나거나 튀어나오지 않게 훌륭히 조율해 낸 젊은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걸작 <백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아들이다. 역시 부전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