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소리 나는 영화'의 장르로 자리매김해온 공포영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생성돼 온 소재의 다양성과 영화내.외적인 변화에 힘입어, '공/포/영/화'라는 짧은 음절 안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새로운 영역들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같은 자신의 운명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던 호러영화는 결국 다음과 같은 하위장르들을 잉태했다. '하드고어', '스플래터 또는 슬래셔, 오컬트, SF, 엽기, 좀비호러 등등
허나 각각의 하위장르가 뒤죽박죽 섞여 확실한 경계선을 그리기에는 매우 애매모호한 구석들이 많아 이게 호러인지 에로인지 스릴러인지 엽기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즉 관객들인 우리의 심기를 오다가다 툭툭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끊임없이 발생해 안타까움을 낳고 있다. 중요한 건 전통 호러든 잡종 교배된 공포물이든 재밌고 무섭고 흥미로우면 그만인데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공포 영화 중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같은 혼란스런 시국에 적응을 못한 나머지 작년에 초대박 인기를 누렸던 <겨울연가>의 최지우와 배용준의 연애질 드라마를 보고,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 존재의 문제를 제기한 '오컬트 연애질 심리스릴러 호러드라마'라 명명해 본 필자를 허망함의 도탄에 빠트린 적이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하피> <찍히면 죽는다>와 같은 짝퉁스런 한국공포 영화들까지 횡행해 관객들은 속절없이 매표창구 너머 저 멀리 날아간 입장료를 생각하며 비통하게 흐느껴야만 했다.
결국, 작금의 지난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코드에 맞는 호러 영화를 택해 감상에 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밥 먹고 살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란 판에 언제 그런 것까지 일일이 챙겨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고 작품의 옥석을 가리겠는가! 하여, 언제나 그랬듯 여러분의 무비스트가 오늘도 여러분의 수족이 되어 도움을 드리고자 이렇게 나섰다.
자칭 공포영화에 일가견이 있다는 세 명의 정예요원이 소개해 올릴 호러 영화, 다른 거 몰라도 최소한 본전생각은 안 나실 거라 자부하는 바이다.
▶ 저주받은 도시 (Village Of The Damned, 1995) 비디오 DVD 모두 출시
간략한 줄거리부터 읊어보기로 하자. 미드위치라는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절해 죽은 듯 쓰러져 버린 것. 게다가 깨어난 후 동시에 10명의 여자들이 임신의 징후를 보인다. 태어난 아이들은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에 번쩍번쩍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지능은 높지만 냉혹하기 그지없는 생물들. 아이들은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처참히 살해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의 위협에서 해방되기 위해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하필 아이들을 괴물로 묘사한 것은 감정적 성숙 없이 지능만 발달해버린 현대아이들에 대한 메타포로도 해석 가능할 것 같다. 마치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전멸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절해 쓰러져있는 마을 사람들을 비추는 장면이나 크리스토퍼 리브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그의 딸이기도 한 마라가 벌이는 심리적 싸움 등이 특히 볼거리. 마라의 어머니 바바라가 아이의 눈을 본 순간 갑자기 울부짖으며 팔을 펄펄 끓고 있는 수프 냄비에 처박아 버리는 부분은 가장 끔찍한 장면으로 꼽을 만 하다. 조잡한 면도 없지 않지만 묘하게 예쁘고 매력적인 영화. (임지은)
▶ 샤이닝 (Shining, The, 1980) 비디오 출시,DVD 미출시
그런 의미에서 하필 <샤이닝>―본 사람들한테는 닳아빠진 느낌을 줄 정도로 익숙하고, 아직 못 본 사람에게는 출시됐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엔간해서는 찾기 힘든 애증의 대상쯤으로 여겨질―을 선택한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또는 왜 무서운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에 다름 아니다. 좌우대칭으로 된 프레임, 미로로 된 정원, 바닥의 반복무늬,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듯 널찍한 호텔은 공간 자체로 공포가 된다. 요컨대 살해당한 아이들의 유령이 출몰하긴 하지만, 영화의 진짜 괴물은 바로 호텔 그 자체라는 것. 급격히 정신이 이상해져 가는 잭이 스스로 호텔이라는 성안에 자신을 감금하듯, <샤이닝>의 공포는 바로 편집증에서 온다. 끝없이 반복되는 의문의 단어 “레드럼(REDREM)"이며 원고지를 빼곡히 채운 같은 글귀들은 집요함과 광기의 순환고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들. 거기 더해 잭이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폭력성이나, 대니가 ‘샤이닝’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화의 복선으로 기능한다.
여튼 <적과의 동침>의 의처증 남편이 끊임없이 듣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처럼, 집요함과 광기에 대한 공포는 머리보다는 피부로 직접 와 닿는 대단히 생리적인 것이다. 얘기해봤자 무의미하고, “봐야 안다”는 것이 또한 <샤이닝>을 추천하는 이유 한 가지. 그리고 눈에 둘러싸여 고립된 결벽적인 호텔에 갇힌 세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내 입에서도 입김이 나오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추운 적은 없었다. (임지은)
▶ 뱀파이어 서커스 (Vampire Circus, 1972) 비디오 출시
19세기 중부 유럽의 고성에 사는 흡혈귀 미터슈타인 백작은 아이들을 공격하고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부활과 모든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저주를 남기는데, 그가 죽은 후 마을에는 이상한 전염병이 유행한다. 병의 전파를 우려한 이웃 마을 사람들은 바리케이트를 쳐 그들이 마을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고, 그렇게 15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마을에 이상한 서커스단이 도착하는데 그것은 미터슈타인 백작을 부활시키려는 음모였다.
이 영화의 주된 희생자는 아이들이다. 흡혈귀들은 미터슈타인 백작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마을 아이들의 피를 노리고 힘없는 아이들은 흡혈귀들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커스단이 등장하는 이야기답게 펼쳐지는 서커스 공연과 맹수들, 그리고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거울 이야기 중 하나에 들어갈 진실의 거울이 있는 방 등 여러 장치들이 영화에 기묘한 힘을 부여한다. 결말을 미리 밝히자면, 결국 사람들은 흡혈귀 무리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승리를 선언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서둘러 떠난다. 과연 흡혈귀의 저주는 끝난 것인가?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도 질문이 돌아간다. 과연 관객들은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유령)
▶ 우주 생명체 블롭 (Blob, The, 1988) 비디오 DVD 출시
<우주 생명체 블롭>은 이렇게 원작에 서린 냉전의 기운을 씻어낸, 비주류 정신의 찬가가 된다. <우주 생명체 블롭>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유명한 영화가 아니지만 접해 본 사람들에게는 뜻밖의 즐거움을 줄 그런 작품이 틀림없다. (유령)
▶ 트로미와 줄리엣 (Tromeo and Juliet, 1996) 비디오 출시
흑인 아버지를 두었고, 허구한 날 포르노 동영상을 보며 용두질(자위) 삼매경에 몰두하는 트로미오, 폰 섹스를 즐기며 아버지의 성적학대로부터 고라워하는 레즈비언인 줄리엣. 토탈 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트로미와 줄리엣>은 이 같은 캐릭터 설정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배신을 때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아주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결국, 이 영화는 공포영화란 쾌락적이고 코미디라는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라는 고전적 경구들의 의미를 오늘날 되살려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유치하지만 즐겁고, 오바스럽지만 부담 안 되고, 역겹지만 다시금 역겨워지고 싶은 충동을 가차 없이 일으키게 하는 재기발칙한 상상력의 영화 <트로미오 줄리엣>은, 트라우마의 작품 중 유일무이하게 국내비디오로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에로 영화 중에 실수로 포착되는 한 터럭의 발견과 같은 대감동의 물결 그 자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대원)
▶ 엔젤 하트(ANGEL HEART, 1987) 비디오 출시
어쨌든, 미간에 이두박근이 생길 정도의 긴장감과 후두부좌우 신경망이 잠시 교란될 만큼 반전을 지닌 스릴러 공포물 <엔젤 하트>는 50년대의 필름 느와르적인 분위기, 인상적이고 무거운 그림자의 빈번한 등장, 선지피가 낭자하지만 왠지 모를 고혹적 매력이 풍기는 듯한 시체들, 그리고 한번 보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상징적인 컷들을 파우스트적인 서사 안에 위치시키며 주조한 영화다.
참고로 미키 루크와 미치고 죽을 것 같은 정사 제의를 기똥차게 소화해낸 미모의 흑인여배우는, 바로 80년대 최고의 TV히트작인 코스비 가족의 장녀, 리사 보네트다.(서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