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블린>은 부성을 내세운 순박한 영화다. 실직한 후 가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떠나고 가족법에 의해 아이들을 빼앗긴 한 아버지의, 아이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돈 없고 빽 없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마음밖에 없는 가장에게 법은 냉정하다. 오로지 다시 가정을 꾸리겠다는 일념으로 술을 끊고, 직장을 구하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으로 그의 발목을 잡는다. 연락이 끊기고 사실상 이혼 상태인 그녀를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가족법은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법이 아니다.
영화는 이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고 뭔가 잘못된 법 때문에 고통받고 그에 대항하는 개인의 진심을 지지한다. 법은 냉정하지만 다행히도 사회는 냉정하지 않다.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아님에도, 오히려 시간 낭비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돕는 변호사들이 있고, 그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여인이 있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기에 그를 진정으로 응원하는 대중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는 외롭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에블린>은 사람에게 희망을 건다. 개인의 미약하고 투박한 시도는 마침내 법을 바꾼다. 거대한 체제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은 다시 주체로 부상한다. 낙관적인 믿음은 순진하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비관주의자들에게 영화는 엔딩 자막으로 나직이 용기를 준다.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더욱 희망적인 것은 아버지의 노력이 구조뿐 아니라, 그 스스로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실직자에 난폭한 고주망태가 아니다. 아이를 되찾기 위한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깨닫고 실천한다. 그래서 영화는 한 남자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는 다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따뜻하고, 절실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 결속은 단단하고 행복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직접 제작을 맡은 이 영화에서 과거의 번드르르한 제임스 본드 이미지를 과감히 벗고 최대한 텁수룩 컨셉으로 분해 열혈 아버지로 변신한다. 그의 얼굴에서도 이제 세월이 느껴진다. 에블린 역의 소피 바바소는 혀를 내 두를 만큼 똑 부러지는 말과 행동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어렵게 자라 일찍 철든 것 같은 아이의 영민함이 기특하기도 슬프기도 하다.
주로 아일랜드 하층민의 부박한 삶의 현장을 비추는 카메라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그 삶은 결코 초라하거나 궁핍하지 않다. 살갑고 활기에 차 있다. 각각의 삶은 어렵지만 서로 만나고 부대끼고 나누기에 결코 외롭지 않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함축되는, 아버지가 드디어 에블린을 안아 올리며 환하게 웃는 그 장면에서 아일랜드의 자연은 비로소 찬란히 광활하고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