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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 열까 말까?
어댑테이션 | 2003년 5월 12일 월요일 | 임지은 이메일

창작의 원동력은 아마도 질투일 것이다. 타인, 그리고 그 작품의 눈부심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알아보고 거기에 존경이나 질투심을 느껴버리게끔 만들어진 사람이라면 어쨌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유명해지느냐, 아니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젊은 날의 추억의 노트 속에서만 남아있게 되느냐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머리칼이 숭덩숭덩 빠져버릴 정도로 고민하고 급기야는 자기 자신에게 치를 떨면서도 만들고 또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흔히 산고에 비유되기도 할만큼, 창작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것은 범인에게는 외계인과 거의 동의의 단어로 들리는 ‘천재’라는 수사마저 드물지 않게 듣는 재능 있는 작가에게라도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 가장 간략한 말로 정의해본다면―그래도 역시 영화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함 때문에 명료하지 않게 들리기는 매한가지지만―<어댑테이션>은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걸출한 시나리오작가가 <난초도둑>이라는 논픽션을 각색하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자’의 지리하고 근엄한 고뇌를 형상화한 예술가영화, 라고 작품을 정의내리는 것은 물론 오산이 될 테다. <어댑테이션>은 누가 뭐래도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인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그의 작품인 <존 말코비치 되기>를 떠올려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이 될 듯 하다.

타인에 대한 동경,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 이 진부하기까지 한 인간 공통의 감정을 영화 안에 담아내기 위해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를 스토킹하는 대신 그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인간이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중 가장 슬픈 능력은 아마도 독심술이 아닐까. 어쨌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으니 더는 돌이킬 수 없다. 크레이그와 라티, 그리고 맥신 세 명의 주인공은 말코비치의 머리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뒤엉키고 끝간데 없이 치닫는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관객에게도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은 영화여서, ‘역대 최고 스케일’ 기타 등등 드럼 둥둥의 뻑적지근한 카피를 늘 달고 다니게 마련인 롤러코스터 같은 블록버스터와는 또 다른 의미로 영화가 줄 수 있는 자극의 임계선을 결정해버렸다.

결핍과 동경, 그리고 나의 존재보다 더 엄연한 것 같은 욕망이 만들어내는 아비규환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어댑테이션>은 <존 말코비치 되기>와 동일하다. 그리고 영화가 전달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자극의 극대치라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쌍둥이처럼―하기야 같은 각본가에 같은 감독이긴 하다. 게다가 <어댑테이션> 안에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세트장과 배우들이 공공연하게 등장하기도 하니―닮아있다. 그리하여 또다시 판도라의 상자. 이걸 열어야 해 말아야 해? <어댑테이션>을 관람한다는 것은 그 인간 본연의 딜레마와도 긴밀히 닿아있다. 흥미진진한 호기심과 그 후 필연적으로 닥칠 혼란을 저울질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하야, <어댑테이션>은 확실히 요모조모 생각을 굴려보기 전에 이미 머리 속으로 쑥 들어와 있는 ‘쉬운’ 영화는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쉽지 않다’는 감흥의 가장 큰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꾸려가는 영화 속 여정 이외에도 끌어안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데에서 유래할 것. 고금을 통해 아는 것이 병이라 했으니, 어허. 영화를 보기 전 ‘천재 각본가’에 대한 사전 정보나 줄거리, 영화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너무 많이 알아두지는 않기를 바란다. 어디까지가 진짜 찰리 카우프만이고 어디까지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한 픽션의 찰리인지, 소위 속아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지 전전긍긍하면서 상당부분을 흘려보내기에 영화는 지나치게 재미있기 때문에. 찰리와 쌍둥이 동생 도날드, 판이하게 다른 1인 2역을 멋들어지게 구현해 낸 니콜라스 케이지의 재주에는 다시 한 번 놀랄 만 하고, 무려 ‘메릴 스트립’이면서 영화 안에서는 메릴 스트립이라는 사실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메릴 스트립은 역시 메릴 스트립이다(라고 하니 돼먹지 않은 언어유희 같아 써놓은 스스로도 짜증이 나려 하지만). 한편 난초광 라로쉬의 기묘한 에너지를 화면 가득 넘쳐흐르게 한 크리스 쿠퍼는 오스카 남우조연상으로 그의 탁월한 연기에 대한 회답을 받았다.

아는 것이 병, 이라는 말을 끄집어냈지만,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댑테이션>을 보기 전 이 영화만은 미리 봐두기를 권한다. 어디까지나 강요 차원이 아닌 영화의 재미를 보다 온전히 즐기기 위해, 라는 목적에서긴 하지만. 팁으로 몇 가지 덧붙이자면 <어댑테이션>의 각본은 찰리 카우프만과 도날드 카우프만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것으로 되어있다. 물론 도날드 카우프만은 영화 속 찰리의 동생이자 카우프만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 찰리와는 달리 매사 자신감 넘치고 활달하며 ‘인생을 쉽게 사는’ 도날드는 찰리가 증오하면서 동경하는 타인이자, 자기 안의 결핍의 표상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그리하야 도날드 카우프만은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된 최초의 가상인물이 되었다는 얘기. <난초도둑>의 작가인 수잔 올린은 영화 속에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고 한)다.

2 )
karamajov
이 리뷰 추천하고 싶은데 추천버튼이 없어요. 특히 첫 단락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2009-03-14 18:37
ejin4rang
상자를 열어라   
2008-10-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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