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별건가? 비록 성서에서는 ‘모든 것 중 으뜸은 사랑’이라고 갈파하고 있지만, 사실 러브스토리의 러브는 곧 연애를 가리킴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치면 내 사랑도 사랑, 지하철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주물러대는 좀 곤란하다 싶을 정도의 추남추녀 커플―요런 경우에는 눈꼴시다기보다 왠지 “어흑, 너흰 정말 서로 사랑하는구나”라는 식의 측은함+응원 마인드가 된다―의 열정도 사랑, 노래 가사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일 ‘그것’도 사랑이다. 정말이지 ‘사랑’이 너무 많다. 내가 없어지고 나면 세상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민초들의 개인사.
그럼에도, 러브스토리는 영원하다. 만화 <쿨 핫>에는 두 사람 사이의 가장 놀라운 화학작용인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정의가 등장한다.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기적이잖아. 안 그래? 우주적인 이벤트지.” 말 그대로 한 사람이 곧 세계라면, 나의 빅뱅인 사랑은 ‘우주적인 이벤트’ 그 자체. 그리하여 러브스토리 속에서 우리는 내 것과 닮은 듯 다른 남의 사랑을 몰래 엿보며, 내가 처음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때의 두근댐을 되새긴다. 혹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기류 속에 젖어들며 대리만족을 느껴보기도 한다.
가진 거라곤 강단과 성깔뿐인 무명 성우 공희지(장나라)의 꿈은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단짝친구를 모욕한 유명 여행사 팀장(박정철)과 한 판 붙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남자는 평생 그려온 이상형이었다. 그리하여 불굴의 그녀 공희지, 이 쌔끈한 남자를 손에 넣기 위해 가열찬 스토킹과 각종 딴지걸기에 나선다. <오! 해피데이>는 상당부분 오버액션에 의해 굴러가지만, 이는 비판해야 할 약점이라기보다는 영화가 발딛고 있는 토대 그 자체. 또한 첫눈에 반한 남자의 집에 침입해 몰래 창문으로 도망치려다 배추가 담긴 물통에 빠지고, 걸려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저 가공할 치질의 고통에 신음하는 공희지로 장나라 이외의 인물을 떠올리기는 불가능하다.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대로 영화는 장나라의 기존 이미지와 개인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사실 <오! 해피데이>가 보여준 가장 큰 성과는 장나라의 코믹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것. 영화를 지탱하며 객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장나라의 재간과 스타성은 확실히 무시 못할 파워다. 장나라는 사랑스러운가? 필자는 남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장나라의 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공희지는 사랑스러운가? 그런데 같은 듯 다른 이 질문에 대해서는 도저히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 힘들어진다.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장 원초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종잇장처럼 얄팍한 개성의 현준 캐릭터는 그렇다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공희지에게 따라붙는 ‘사람 냄새나는 여자’라는 수식어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치질에 걸리고, 성격이 까탈스럽지 않고 화끈하고, 먹성 좋고 술을 잘 마셔서 ‘인간적’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인을 돕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의 소유자라서 ‘인간적’인가? 이 두 가지를 모호하게 뭉뚱그려 버무려놓고 ‘사람 냄새나는 매력적인 여자 공희지’를 강변하는 영화는 명백하게 개념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가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환경 운동에까지 뛰어들 때 눈쌀을 찌푸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물론 로맨틱 코미디에 ‘정치적으로 반듯한 태도’ 같은 것을 강요하려 하거나, 관객인 나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떳떳한 인간이라서는 아니다. “그래도 너는 이러면 안되잖아. 정의감에 넘친다며?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라며? 순수하다며?”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그렇게 되묻고 싶어지는 거다.
한편 귀여운 스토커와 쌔끈남의 좌충우돌 연애행각 외에 영화가 표방하는 것 또 한 가지는 가족의 훈훈한 사랑. 그런데 여기에 와서도 역시 관객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진실하고 따뜻한 가족의 사랑으로 간주하기엔 영 흘러가는 방향이 떨떠름하고, <가문의 영광> 식의 다분히 속물적인 유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하기엔 공희지 앞에서 쏟는 아버지(장항선)의 뜨거운 눈물이 영 신경 쓰인다. 아버지는 왜 눈물을 흘렸는가? 남부럽잖은 부잣집에 태어나 호의호식하게 해주지 못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가도를 달리는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에게 어울리는 여자로 만들어주지 못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사랑에 가슴앓이 하는 딸이 애틋해서? 얼핏 떠오르는 세 가지 답 중 어디에도 동그라미를 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영화는 제 3의 답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로서 <오! 해피데이>가 가진 미덕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연인과 가족, 그리고 박애에서 ‘정의감’까지 다양한 사랑―정의감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바꿔 부를 수 있을 테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한 가지로도 관객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는 것 역시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오! 해피데이>가 킥킥 웃음과 흐뭇함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순간 한 가지는 치질로 입원한 희지에게 현준이 ‘아주 특별한 선물’을 전달해주는 부분. 남자의 엉뚱한 마음씀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감정적 거리가 가까워졌음을 눈치채게 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조기 종영한 시트콤처럼 들쑥날쑥 맥락 없이 치달아버릴 때 둘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하여, 씁쓸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귀여운 아가씨. 네게 사랑은 너무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