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 X>에 관한 수입사-관객-평론가들에게 한결같이 영향을 준 오해 한 가지를 밝히면서 시작하자, 그것은 이 영화가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결코 넘쳐나는 정신분석학 담론에 의해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닳아빠진 '근친상간'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레오 까락스가 의도했건 아니건).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자벨이 피에르의 이복누이라는 사실이 모호하다는 것에 있다.
1. 이자벨의 말 이외에는 그 어떤 확증도 제시되지 않는다.
2. 오히려 그 사실이 허위임을 암시하는 몇 가지 시퀀스만이 제시된다.
- (1) 피에르는 과거 이자벨의 거처였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방문을 때려 부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 (2) 피에르의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이자벨은 당황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 (3) 그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단지 "진실이야, 믿어야만 해"라고만 호소하는 이자벨의 태도
또한 피에르가 이자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이복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그 '인식'이전에 운명의 상대라는 것을 '직관'(베르그송적 의미에서)하는 그 자체에 있다 (이자벨을 만나기 전부터 쓰던 소설에서 그는 한 단어를 '무모하게도'라는 단어로 바꾼다). 오히려 이 '인식'은 그러한 '직관'을 확증하는 매개로 등장한다. 더구나 역설적으로 근친이라는 사실은 사랑에 제동을 거는 장애물이 아니라 사랑의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 근친상간에 대한 어떤 공포도 느끼지 못하고 그들에게는 근친상간이 금기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에 관한 영화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폴라 X>는 '기원'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 '기원'의 허구성에 관한 탐구이다. 뉴스릴과 같은, 이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부터 이 점은 예상된다. 이 시퀀스는 마치 이 영화의 의도를 말하려는 듯 하다. 보스니아 내전을 연상시키는 폭격, 파괴되는 도시, 그 위로 흐르는 복화술을 통한 듯한 소리('목'소리가 아니다), "나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해야 할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라는 소리의 내용은 '인간들은 왜 '기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다투고,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을까? 이 영화로 '기원'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라는 의도의 제시로 읽힌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두가지 차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실-기원-빛-명백함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반복-어둠-모호함의 차원이다. 영화 <폴라 X>는 대립된 두 차원이 교차되면서 진행한다. 휘황찬란한 '빛 속의' 대저택(혈통-기원의 명백함),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자벨의 이모를 추궁하는 파리의 경찰들(기원에 대한 집착), 이자벨이 같은 혈통(기원)이라는 사실(핏빛 강물은 이에 대한 집착을 시각화한다), 피에르 아버지의 사진(사실, 기원), 초기 산업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듯한 공장(자본주의의 기원) 등이 전자의 차원에 놓여있다. 후자의 차원에 놓인 대표적인 두 개의 시퀀스는 주로 어둠 속에서 흐릿하고 모호하게 드러난다 : 이자벨이 숲에서 피에르에게 자신이 이복누이임을 밝히는 장면("진실이야, 믿어야만 해" - 이 말은 계속 반복된다), 피에르와 이자벨의 격정적인 정사 장면(같은 혈통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두 사람의 진실의 산물 : 사실을 표현하려고 하기 보다는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실제' 정사 - 우매한 공진협은 이 장면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팽팽하게 대립된 이 두 차원의 균형이 파괴되는 결정적인 국면이 영화를 혼란 속에 내던진다. 그것은 피에르가 알라딘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 <빛 속에서>에 응축되어 있다. 그 소설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알라딘이 피에르였음을 밝히는 한 방송 프로그램 사회자의 언급으로부터 피에르 자신의 실제 삶에 근거한 자서전적 내용임이 암시된다. 이 점으로부터 필름 느와르적 컨텍스트를 개입시키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이 다시 읽혀질 수 있다.
소설을 읽은 한 여인 famme fatal이 소설속의 한 인물이 실제하는 것인양 가장하여 피에르에게 접근하고 피에르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듯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이후 피에르는 이자벨과 함께 하는 생활에 근거하여 소설을 계속 쓴다. 가장(반복)이 하나의 사실을 낳고 그 사실은 소설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여기에서 순수한 사실, 기원, 명백함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들로 추측되었던 요소들이 반복, 모호함으로 전치된다. 역설적인 것은 이 전치에서 진실('사실'이 아닌)이 '직관'('인식'이 아닌)된다는 것이다. 피에르와 이자벨의 사랑은 '사실'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차원에서 '직관'되고 믿어질 뿐이다(이 점에서 '실제' 정사의 위상은 또 다른 중요성을 획득한다).
또 다른 역설은 '빛 속에서'라는 소설의 제목에 있다. 제목과는 모순되게 그 소설의 내용은 어둠의 차원(이자벨과의 생활)에 속해있다. 그런데 피에르가 그 소설이 표절이라는 통보를 받을 때 (피에르의 또는 관객의 또는 내러티브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자서전적인 그 소설이 표절(반복)이라면 그 소설에 대한 기원인 그의 삶 자체도 기원(사실)이 아니라 표절(반복)일 뿐이라는 것과 다를바 없게 된다.
그렇다면 기원은 무엇이며 사실은 무엇인가? 기원과 사실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명백한 기원, 사실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온통 모호함만이 남는다. 이를 드라마화하려고 한 듯 영화 <폴라 X>의 대타자는 피에르의 아버지(시작부터 죽은 것으로 설정된다), 어머니, 사촌 티보를 차례로 죽인다(피에르의 혈통-기원의 소멸이자 이자벨의 기원에 대한 증거의 부재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레오 까락스(그의 의식뿐아니라 무의식까지도)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다시 뉴스릴 같은, 영화의 첫 시퀀스로 돌아가자.
보스니아 내전과 같이 기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참혹한 살육과 인종청소의 현실. 영화 <폴라X>에서 피에르와 이자벨은 기원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 이전부터, 기원과 사실의 모호함 속에서도, 기원과 사실이 소멸하고 오직 남은 것은 반복과 진실뿐일 때마저도 서로 사랑한다. 반면 진실이 부재하는 이상 기원의 동일성과 명백함은 별 의미가 없기에 피에르는 그의 사촌 티보를 살해한다.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인종청소의 현실은 결코 불가해한, 불합리한 우연적 산물이 아니라 서구의 지배적 세계관인 로고스 중심주의의 다른 이름인 기원 중심주의, 사실 중심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며 이는 거의 모든 인간을 편집증 환자로 개조해버렸다. 이 환자 집단은 피에르 일행을 파리의 호텔에서 어느 공장으로 추방하여 격리시켜 버린다. 여기에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기원의 이질적인 인간들의 프롤레타리아로의 전락. 기원 중심주의는 깨끗한(?) 세계를 위하여 인종청소를 하는데 있어 자본주의와 동맹한다. 그 공장에 기거하는 사람들은 피에르 일행과 유사한 여정을 거쳐 그 곳으로 추방되어 온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레지스탕스가 되었다(그들의 총에 의해 티보는 살해된다). 머지 않아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다는 듯이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자본주의를 위한 레퀴엠처럼 들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