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프랑스에 사치스런 환락과 무절제의 공간 그 자체였던 파리판 극장식 스텐드빠 '물랑루즈'가 있었다면, 미국에는, 본질적으로는 동종업소지만 드나드는 사람들이나 업소의 물관리 상태로는, 물랑루즈와 완전 극과극을 이루는 업소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19세기 중반 미국 골드 러쉬 시대의 캘리포니아 킹던 컴 마을에 위치한 너절한 단란 주점되겠다.
본 업소는, 미국의 비인간적인 개척사를 배경으로, 철저하게 와해되는 한 가족의 변천사를 암울하게 훑어보는 영화 <더 클레임>에서 가장 빈번하게 노출 애용되는 비루한 공간에 해당된다. '노래하는 소주마차'에 해당되는 이 술집을 서두부터 거론한 이유는 비디오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됨으로 너무 궁금해하지 말길 바란다.
골드러쉬 당시, 금덩이에 눈땡이가 어두워져 마누라(나스타샤 킨스키)와 자식(사라 폴리)을 금과 채굴권으로 장터에 나가 물물 교환하듯, 아무 죄책감 없이 제까닥 바꿔버린 한 파렴치한 놈(피터 뮬란)은, 결국 킹던 컴이라는 마을로 들어가 자기 혼자 부와 권력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산다.
<더 클레임>의 감독은 케이트 윗슬렘이 출연했던 96년도 작 <쥬드>를 연출했던 영국출신의 마이클 윈터바텀이다. 별반 국내에서 화려한 조명빨을 받지 못한 윈터바텀은 어떻게 보면 영화제용 감독이라고 불릴 만큼 베를린이니 깐느니 하는 유수의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이 초청되었던 연출자다. 물론, 작년에 열렸던 깐느영화제에도 여지없이 <24시간 파티 피플>이라는 2001년도 작품으로 공식경쟁부문에 초대되었다. 하지만, 그간 수상한 적은 없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들쭉날쭉하고 밋밋한 그의 영화적 내용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는 색깔이나 때깔이 너무 없지 않느냐는 둥 적잖이 폄하된 논평도 여러 번 나왔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영국의 좌파 감독인 켄 로치의 실천적 행동에 크게 감명 받아 분명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계급적인 모순을 나름대로 묘파했던 감독이다. 보스니아의 내전을 다루었던 <웰컴 투 사라예보>나 가혹한 멜로드라마 구조 안에서도 자신의 계급적 의식을 또렷하게 심어놓은 <쥬드>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사회비판적이고 묵시록적인 우울한 산업사회를 활자로써 드러냈던 소설가 토마스 하디의 원작을 종종 각색해 영화화 해낸 윈터 바텀의 이력을 생각해봐도, 절대로 만만하게 쥐락펴락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토마스 하디의 원작을 바탕으로 연출했던 <쥬드>에 이어 또다시 그의 1886년 작 <캐스터 브릿짓의 시장>을 여기저기 손봐 2000년도에 내놓은 <더 클레임>은, 계급적 문제의식 못지않게 어두운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황폐해지는 인간의 심리묘사에도 상당한 비중을 둔 영화다. 평범하고 잔잔한 이야기 구성, 시대적 상황과 잘 어울리는 을씨년스런 산 속의 풍광을 잘 잡아낸 영상미, 그리고 인간의 비애감과 외로움이 차고 넘칠 정도로 담겨져 있는 듯한 배경음악 등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요소들을 두루 갖췄다. 허나, 뭐니뭐니해도 <더 클레임>을 통해 별다른 주의력 없이도 길어 올릴 수 있는 재미는, 바로 캐릭터에 적자인 배우들의 호연이다.
불치병에 걸려 2시간 내내 인상만 쓰다가 들어간 나스타샤 킨스키의 연기는 분명, 화려한 캐릭터의 그것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이 가능만 하다면 간병인을 자처할 마음이 생길 정도로 사실적이고 애처럽게 병자의 모습을 잘 살려냈다. 물론, 운도형과 연배가 비슷한 데도 아직까지 매혹적인 이미지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한 모습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업소의 매음녀 역할을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잘 살리며, 요염한 자태를 한껏 발산한 <제5의 원소>의 밀라 요보비치, 또 나스타샤 킨스키의 딸로 열연한 사라 폴리의 초짜배기답지 않은 내적묘사의 열연은 매우 성공적이다. 더더욱 놀란 점은 그녀가 나스타샤 킨스키의 이미지와 얼굴의 생김새 모두 진짜 모녀라고 할 정도로 요목조목 닮았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한 시대를 크게 펼쳐놓고, 네바다 산맥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싸늘한 풍광과 함께 한 가정의 안타까운 비극적 이야기를 큰 굴곡 없이 차분하고 담담한 영상에 채워 놓은 <더 클레임>의 결말에서는, 속절없는 인생의 덧없음을 주인공들의 생의 마감과 함께 잘 재현해 보여준다. 그 와중에서도 인간들의 졸렬함이란 어떤 것인지 또한 무심하게 영화는 천천히 드러내고 있고.
이처럼 <더 클레임>은 진득하고 세밀한 짜임새가 돋보이는 연출과 등장인물들의 연기력이 잘 버무려져,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질 그 당시 인간 군상들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어두운 분위기가 밀도 있게 잘 포착돼 출시된 성숙한 드라마라는 점, 잊지 말고 가슴살에 꼭 챙겨 넣으시길 바라마지 않는 바다.
*믿거나 말거나 팁
영화에서는 그 당시 철도가 어떠한 식으로 증설되고 이권에 개입되는지 조금 보여주는데, 남한에서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도 바로 이 철도사업과 연관이 있다. 바로 미국과 한국의 합작회사인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에 경성(서울)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전차승객들을 끌어 모으고자 처음으로 활동사진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