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전문 용어가 아니죠? 그럼, 어떤 영화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나쁜가요? 그렇다고 대답하는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매우 엄격한 사람들이죠. 그런 영화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고 관객을 계몽합니다. 관객이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연민이나 공포에 빠져들게 만드는 영화는 나쁘다는 겁니다. 관객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저도 한때 그런 의견에 솔깃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아주 돌아선 것은 아니고, 그런 영화들 안에서도 옥석은 가려져야 한다는 거지요. 거칠고 딱딱한 자세에서는 좋은 스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카타르시스를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을 탐탁히 여길 리가 없겠지요. 관습을 싫어하니까요. 당연히 뮤지컬 영화에 대해서도, 그 관습적인 환상으로의 도피에 대해서도 따끔한 질타를 아끼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것으로 다일까요? 영화는 본래 환상이 아니던가요? 현실과 똑같은 빛을 만들기 위해서도 영화는 빛을 얼마나 공들여 조작하는지, 전문가들은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그 역설에 대한 탐구 없이 휘두르는 현실/환상의 잣대는 허공을 가르고 말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참,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는 하시나요?
어렸을 때의 기억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도 '명화극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살아있습니다만, 옛날에는 정말 명화들만 보여줬거든요. 작고한 영화평론가 정영일 아저씨가 매번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만했습니다. 대개는 일요일 날 종일토록 펑펑 놀다가 저녁 먹고 TV 앞에 눌러앉아 '수사반장'까지 보고 나면, 범행을 숨기고 있는 자라도 된 듯 숙제 걱정으로 가슴이 묵직해지곤 했는데, 그럴수록 기를 쓰고 TV에 매달리게 되는 심리는 다 아실 거예요. 어릴 때는 왜 뉴스가 제일 지루하잖아요. 그래도 참고 견디다 보면 드디어 기다리던 '명화극장'이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더 커서, 제 꿈의 여인이었던 올리비아 뉴튼 존이 나오는 <그리스>를 영화관에서
<시카고>는 뮤지컬 영화 치고도 특이합니다. 노래와 춤을 빼버려도 줄거리는 거의 다치지 않습니다. 쇼는 쇼대로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서로 대응하면서 흘러가거든요. 모든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쉘부르의 우산>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시카고>에서 쇼를 걷어내고 나면 이 영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좀 심했나요? 언론과 법정에 대한 풍자가 그럴싸하지 않냐구요? 하지만 감탄할 만한 르네 젤위거의 인형 쇼와 기억에 남을 만한 리처드 기어의 탭 댄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랬을까요? 아마 그 정도는 평범한 터치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명색이 뮤지컬인데, 노래와 춤이 빠져도 온전히 남는 줄거리 따위가 대단할 리 없는 거지요.
얘기하다 보니, <시카고>를 보고 쓰는 글에서 정작 <시카고>에 대한 언급이 곁가지로 흐르는 얘기가 되어버린 듯하군요. 다시 ‘몰입’에 대한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돌아와서 계속 <시카고>를 건드려 보지요. 또 여쭙겠습니다. <시카고>를 보면서 영화에 빠져들게 되던가요? 아직 못 보신 분들은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저는 또 이렇게 저를 완강히 밀쳐내는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워낙 영화를 유아적인 자세로 보는 편이어서, 밀쳐내려고 작정한 소위 예술영화들도 곧잘 파고들어 쏙 안기기를 잘하거든요. 그런데 아니 이건 아카데미가 인정한 영화를 앞에 놓고…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지루해서 혼이 났어야 정상 아닌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죠?
몰입은 줄거리를 따라가며 하게 되는 법인데, <시카고>는 쇼가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보여주니까, 그리고 진짜 재미는 그 쇼에서 나오니까, 그런데 쇼는 역시 쇼라서 감정 이입까지는 할 것 없이 그냥 보면 되니까… 그러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줄곧 그런 느낌 속에서 뮤지컬 영화들을 즐겨왔다 이 말이지요. 다만 대개의 뮤지컬 영화들은 그래도 웬만큼 빠져들었다가 빠져나오게 해 주었던 것이고, <쉘부르의 우산>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어색하다가 줄기차게 듣다 보면 노래가 그냥 대사 같이 익숙해져서 오히려 몰입이 가능했던 것이고, <에비타>는 이도 저도 안 돼서 최악이었던 것이고, <코러스 라인>은… 그 영화는 또 좀 모양새가 다른데… 그러고 보니 뮤지컬 장르도 결코 간단하지가 않네요.
뮤지컬 영화의 매력 포인트에 대해 얼추 얘기가 된 셈인데요. 좀더 명확한 설명을 덧붙여 볼까합니다. 제가 아까 영화는 본래 환상이 아니냐고 했죠. 말을 바꾸면 영화 자체가 이미 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뮤지컬 영화는 쇼에서 다시 쇼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자, 바로 그 지점입니다. 쇼는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거니까, 관객은 일단 영화라는 쇼를 쇼로 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 하겠죠. 그런데 또 쇼가 나오니 그것까지는… 혹시 그것이 뮤지컬 영화가 관객에게 부탁하는 약속이 아닐까요? 이번 쇼는 진짜 쇼로 봐 달라는…
매력은 그 짧은 전환의 순간에 피어납니다. 멀쩡하게 대사를 읊던 배우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게 바뀌더니, 아 글쎄 노래를 부른단 말이지요. 아무데서나 춤을 추어대고요. 현실에서 그런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어디론가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다시 한 번, 영화는 쇼이기 때문에 그런 게 다 허용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제 알겠어요. 어린 나이에 숙제도 미뤄가며, 빠져들지도 못할 영화에 왜 그리도 흠뻑 빠져버렸던 것인지를. 노래와 춤이 시작될 낌새를 눈치챌 찰나에 느껴지는 이상한 흥분. 머쓱하면서 동시에 달아오르게 하는… <시카고>가 아무리 특이하다 해도 그 매력까지 바꿔 놓을 수야 있나요. 바로 ‘신사 숙녀 여러분…’ 하며 쇼가 소개될 때마다, 한껏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터질 것 같은 에너지가 제 온몸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겠어요? 마치 그 순간만이 진짜 살아 움직이는 시간인 것처럼. 그 앞과 뒤는 온통 쇼니까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