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으로부터 보내온 메시지.
'감각의 제국'의 미국판 제목을 추스려보자. THE REALM OF THE SENSE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딪혀 내는 소리 M을 영역 혹은 제국의 의미를 가진 REALM에서 제거하면 형용사 REAL이 된다. 명사화의 호재를 만난 언어학자처럼 명사화하면 REALITY. 아하! 제목을 다시 한 번 써 보자. THE REALITY OF THE SENSE... 당신은 영화를 보고 리얼리티를 느끼나? 어떤 대답이 돌출될진 모르지만 대부분 그렇다고 할 것이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주고받는 호흡과 거리에 대한 감각의 경계를 느껴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느끼는가?
영화는 현실에 대한 감각을 접고 아둔한 척하며 스크린에 투영된다. 그런 감각은 영화가 만들어 내는 관객에 대한 현실일탈을 호소하는 마비의 기본을 깔고 현실과 상상의 오묘한 교차점과 자장을 만든다. 하지만 그 현실 감각이라는 것. 누가 그것을 마비시키며 누가 그 마비의 대상인지 말할 수 없다. 영화는 상호 호흡(영화와 인간 주체)의 미학이며 일방적으로 관객을 대상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며 또 다른 시간 속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는 현실이 아닌 척 혹은 현실인 척 하고 빠져 버린다. 또한 스크린 속의 투영되는 시간과 공간 즉, 영화의 독립적인 디제시스는 스스로의 날개(감각)를 펴고 극장과 그 바깥의 현실을 유유히 날아다니며 우리 혹은 자신을 괴롭힌다. 누가 누구를 만들고 말고 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감각의 제국'임과 동시에 감각이 살아 움직여 다니며 현실 영역의 경계를 파괴하는 '감각(이 살아있는)의 현실(이 아닐 수도 있는)'이다. 혹은 '예술이 되어 버린 포르노그래피(?)'라 홍보 메시지를 날려 한국의 관객을 어지럽게, 또 한번 예술과 외설의 경계 운운하는 논쟁을 불러 일으킬 여지를 갖는 [감각의 제국]은 현실 감각에 대한 경계 파괴의 끝에서 감각에 대한 이분법적인 경계를 비틀어 만든 우화로 해석된다.
감각은 변덕스럽다. 감각을 가진 물질도 마찬가지. 기치, 그의 몸에 달린 성기(일반적으로 속되게 '자지'라 불리우는 것)는 이성애 관계 속에서 그의 몸을 떠나 자궁(질)과 사다의 손을 떠다니며 성기 자체의 감각을 탐닉한다. 성기는 지연의 효과를 자극한다. 그의 몸을 떠난 성기 감각점은 마찰을 일으키며 스스로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 이제 그 감각마저 성기를 떠난다. 사다에 의해 잘려나간 성기는 기치의 배 위에 미끌어지듯 핏자국들만 남기고 자신의 감각에 대한 맥거핀이 된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형태로... 충격요법으로서의 성기의 극단적인 노출은 오히려 후반부로 갈수록 기치의 성적감각을 져버리고, 관객(아무도 모르는 사이 관객은 이미 끝없는 섹스라는 지루함에 빠진다.)에게서 멀어진다. 기치, 영화, 관객,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감각은 어디로 간 걸까? 사라진 건 아니다. 주어진 상황을 모두 알아차린 상태에서 관객에게만 내던져진 폭탄같은 서스펜스의 효과가 감각의 실종(혹은 재현)속에서 빛을 방출한다. 몸에 묻어나는 육체에 대한 감각은 퇴행의 형태로 서스펜스에 강요된 관객을 자극한다. 눈의 긴장, 더 강렬한 자극, 감각은 이미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종결 형태를 역사 속에, 더 좁은 의미에서(그리 좁진 않고 우주만큼 넓을 수도 있는) 육체의 역사 속에 심어 놓았다. 그것을 관객은 (몸으로)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구조의 축은 그들의 육체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최고의 감각에 이르는 순간(양극), 그 엄청난 지루(혹은 강렬)한 폭발이 일거에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그 폐허 속에서 음극(골 깊은 곳)에 숨어 자취를 감춘 듯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감각이란 자만이 살아 남는다. (영화 시간의 종결, 감각과의 관계는 단절된다.)
아베 사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 싼 감각의 축
묵시적으로 관객의 촉수와 영화의 빛, 키치의 아랫배에서 사라져 버린 감각과 감각점은 사다의 질과 손, 입 그리고, 동경거리를 미친 듯이 들쑤시고 다닌 목조건물 거리에 배어 있었다. 감각과 영화 종반부를 송두리째 앗아간 사다는 권력의 최종 주체, 스스로 자각되어지지 못한 팜므파탈(famme fatal)과 닮은꼴로 보이지만 이것은 영화가 지닌 시각적, 권력 관계적인 추론일 뿐이다. 기치는 감각이 기치의 감각점을 떠나기 가장 극렬한 순간에 최고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엑스터시를 맛보았고, 사다는 감각이 훌쩍 사라져 버린 성기만을 소유한 상태로 영화는 종결된다. 영화를 아우르는 인물들에 대한 시선은 어느 누구에게도 권력을 쥐어주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동시에 영화에서 시선을 되바라보는) 교차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공감각적 물질은 사랑뿐이다. 밀란 쿤데라등의 사랑의 아포리즘 넘어 정치학의 시선을 가진 작가들(SM의 마왕 류에게서도)에게서 사랑이 최고의 정치학 그리고 권력의 최종단계, 돌아서서 권력의 시발로 읽혀지고 있고, 이 영화 속에서도 강렬한 사드 - 마조히즘 적 코드를 읽을 수 있지만 중심이 되는 축은 두 연인 사이의 권력 관계가 아닌 채워도 채워도 배고픈 감각의 굶주림이 중앙에 서있다. 그리고 그 배고픈 감각은 영화가 종결되고도 끝내 채워지지 않기에 모두를 배신하고 사라져 버린 듯 가장 친숙한 시각과 성적 전율을 떠나 숨어 버린다. 역시나 감각은 변덕스럽다.
76년 완성되어 이제야 한국의 극장가에 개봉되는 이 '감각의 제국'은 그 감각의 매개체이자 가장 큰 메타포인 기치의 성기가 모두 잘려져 있다고 한다. 이젠 더 이상 제발 '자지'를 자르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한국의 자기검열에 묶여 있는 남성(한정된 의미로 검열관들, 그들의 어깨 너머의 도덕군자들)들이 지퍼 밖으로 튀어 나와 있는 자지들을 몽땅 잘라 버린지 그 몇 년의 세월인가? 그래도 큰 스크린 속에서 기치와 사다의 애정행각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 질 수 있다. 게다가 애정의 주변부를 부유하는 감각의 이죽거림도 느껴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