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타인의 경조사 때 부조금을 내면 으레 나의 경조사 때도 돌아오기 마련이다. 안 돌아오면 입에서 험악한 소리 나오는 게 우리네의 인지상정이기에, 좀 계산적인 것 같긴 해도 이 물물교환은 어쩔 수 없는 동서고금의 진리나 마찬가지인 기브 앤 테이크의 마인드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에, 여자가 남자를 향해 초코렛을 빌미로 구애를 펼치는 발렌타인 날과 함께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사탕발림으로 포장해 순정을 바치는 화이트 데이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네 것이 아닐지언정.
그래서 무비스트 역시 이러한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지난 번 ‘발렌타인 데이 커플 예감 무비 초이스’에 이어 이번엔 화이트 데이, 커플 예감 무비 초이스‘를 산고의 고통 못지않게 머리를 쥐 뜯으며 비듬을 털어낸 결과. 아래와 같은 영화들을 내놓게 되었다. 대신, 근간의 개봉영화가 아니라 20세기에 선보였던 방화다. 또한, 요즘 세대와는 쉽사리 포개어질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사랑을 담은 작품들로 선별했다는 점 각별히 유념하길 바란다.
부디, 구닥다리 연애행각이라고 대충 흘겨보는 만행을 저지르는 일 없이, 온고지신이라는 경구를 마음속에서 되새김질하며 행동에 임하길 바란다. 그리하면 올해의 작업만큼은 껄떡거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그 이상으로 심히 창대하리라 믿는다. 믿습니까?
소심한 당신, 한 없이 지고지순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을 때 <겨울 나그네> 1986
감독: 곽지균 주연: 강석우 이미숙 안성기 이혜영
뿐만 아니라, 남자인 당신의 앞날의 운명이 상서롭지 못함에 여자를 사귀기가 꺼려진다면 필히, 이 작품을 보길 바란다. 그리고 아래 영화에서 지적할,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한 바로 그 놈!, 그 놈이 이후에 자신과 정을 나눴던 여자와 결혼하는 열통 터지는 배신의 행각이 이 영화에서 바로 목도된다. 눈 크게 뜨고 잘 들 봐두시길 바란다. 어쨌든, 구애를 구하는 당신이나 구애를 당하는 그녀나 둘 다 소극적 성격의 소유자라면 <겨울 나그네>는 당신에게 적잖은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서대원)
바보온달이여, 용기를 가지시라!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감독 : 배창호, 주연 : 안성기, 황신혜
그러나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지금은 바이블이 된 또 다른 사랑의 매뉴얼을 뽀사시하게 펼쳐 보인다. 1987년 당시 청순미의 대명사로 급부상한 황신혜와 예의 그 바보같으면서도 애절한 국보급 미소의 소유자 안성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대포로 대쉬하기' 놀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차나 한 잔 같이 할 까 해서요' 이런 고전적인 대사를 반복 연습하고도 막상 그(녀) 앞에 서면 더듬더듬 바보가 되어버려 알록달록 포장한 사탕은 뒤로 감춰버렸던 당신. 이 영화를 보고 용기를 가지시라! 다시 한번,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구인영)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2 <비오는 날의 수채화> 1989
감독: 곽재용 주연: 강석현 옥소리 이경영 신성일
혹, 당신이 사모하는 여자가 사돈이거나, 엄마와는 웬수지간인 옆집 순이 엄마의 딸이라거나 등등 세상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구하기 힘든 사이라면 어쩔 수 없이 투쟁해야 한다. 영화처럼 어느 정도의 마찰은 예상하고. 그러면 길은 열리기 마련이다. 그 시련의 기간이 좀 길더라도 그 여인에 대한 마음이 일편단심이라면 영화 속의 인물처럼 꿋꿋이 맞서 일로매진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영화의 제목처럼 비오는 날의 수채화뿐만이 아니라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아무 날이나 청청하고 해맑은 사랑의 수채화를 그릴 수 있다. (서대원)
개털인 남자가 멍에를 안고 있는 여자에게 홀딱 빠졌을 때 <101번째 프로포즈> 1993
감독: 오석근 주연: 김희애 문성근 김승우 김금용
갈 때까지 가보자는 순수한 무대뽀 정신과 주변의 아낌없는 지원사격이다. 당신이 만약 능력과 돈이 없어 남는 건 몸댕이뿐이요 주변의 친구들뿐이라면 꼭 문성근처럼 실행해보길 바란다. 올곧은 심신과 지기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만의 큰 매력일 수도 있으니까. 대신, 측근을 활용할 때는 자칫 내 등에 칼을 꽂는 배은망덕한 놈이 있을 수 있으니 필히 유념하시길 바란다. 특히 여친의 미모가 상당하다면 더욱더 세심한 인선(人選)이 요구되어진다. 또한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과거의 남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이 영화가 딱이라 할 수 있다. (서대원)
사랑을 할라치면 이 정도로 <지독한 사랑> 1996
감독 : 이명세, 주연 : 강수연, 김갑수
기름이 줄줄 흐르는 백숙을 먹다가도 쪽쪽 뽀뽀 소리가 나고, 이상한 곳(?!)으로 손이 쑥쑥 들어가고, 유치찬란한 시를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하는 열정적이고 지독스런 나머지 얼띠어 보이는 사랑. 그(녀)가 건네주는 사탕 몇 개 부스러기에 히죽대는 2003년 우리들의 가벼운 사랑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명세 감독 특유의 시각적인 미학, 놀라운 상상력, 빡 힘준 형식미도 여전하다. (구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