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 지나면 2003년 새해가 된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네. 이럴 때 누군가 새해를 함께 축하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아쉬울 뿐이야. 잠깐, 잠깐!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냐고?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나처럼 허전한 연말을 보내고 있을 동창들에게 연락이나 해볼 겸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보는 거야. 혹시 알아? 그때의 그 코찔찔이가 키크고 섹시한 킹카가 되어 나타나서 내가 자기의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할지. 영화를 너무 많이 본거 아니냐고? 히~사실은 며칠 전에 <키핑 더 페이스>를 봤거든.
<키핑 더 페이스>는 죽마고우인 랍비와 신부가 한 여자를 두고 갈등을 겪는다는 특이한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야.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제이크 슈램(벤 스틸러)과 브라이언 핀(에드워드 노튼). 핸섬하고 자신만만한 뉴욕의 잘 나가는 이 두 독신남들이 다른 싱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이크는 유태인 랍비이고 브라이언은 천주교 신부라는 범상치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 어느 날, 이 두 남자에게 초등학교 시절 삼총사를 이루었었던 여자친구 애나 라일리(제나 엘프만)가 나타나. 의리파 왈가닥 소녀에서 아름답고, 유능한 경영인으로 변신한 애나의 등장에 이 두 남자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하지. 그러나 우정 때문에, 종교 때문에, 혹은 자존심 때문에 이 세 사람의 사랑은 갈팡질팡하게 돼지.
오히려 삼각관계에 빠진 유태인 랍비와 천주교 신부라는 발칙한 소재를 거침없이 그려낸다는 점과 역시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교보다도 사랑과 우정이라고 말하는 듯한 결말을 보면 지나치게 신앙을 강요하는 종교적 가치관에 반발하는 것 같기도 해. 사실 한번 더 생각해보면, 유태인의 랍비라는 신분 때문에 '유태인'하고 결혼해야 하는 제이크나 애초부터 신과의 사랑 외에는 어떤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 브라이언이 사랑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잖아.
하지만 종교적인 엄숙함을 파괴하고 대중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신앙에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신세대 성직자인 두 친구의 모습은 정말 유쾌해. 외출할 때는 가죽재킷에 검은 선글라스, 일곱 가지 대죄를 외지 못하는 신도들에게 '브래드 피트 나온 그 영화(<세븐>) 안 봤어요?' 라고 되묻고, 설교 내용을 묻는 신도에게는 '제 설교문이요? 사실 ‘구세주닷컴’ 에서 다운 받은 거예요'하고 대답하는 멋진 성직자들, 누가 이런 랍비와 신부가 싫을 수 있겠어? 그런 곳이라면 매일 기도하러 갈텐데 말이야.
무엇보다도 <키핑 더 페이스>는 연기파 배우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튼이 제작과 감독, 주연까지 1인 3역을 해낸 작품인 까닭에 더 많은 관심이 가는 영화야. <프라이멀 피어>에서 리차드 기어의 상대역으로 스크린에 데뷔, 골든글로브 최우수 조연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올랐던 핸섬하고 지적인 스타 에드워드 노튼. 가장 최근에는 <레드 드래곤>에서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과 두뇌게임을 벌이는 젊은 형사로 우리들 곁을 찾아왔었지. 늘 어둡고 우울한 자아를 지닌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는 그가 이렇게 밝고 명랑하고 귀엽기도 한 신부님이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키핑 더 페이스>만의 매력이야. 특히 애나에 대한 사랑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보는 이에게 그치지 않는 웃음을 선사해.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경쾌한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뉴욕의 아름다운 여름 풍경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점이지. 장면마다 뉴욕의 명소 곳곳을 볼 수 있어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무척이나 뉴욕에 가고 싶어질꺼야. 미술과 의상에도 특별히 신경을 기울인 덕에 애나 라일리역을 맡은 제나 엘프만은 그녀의 옷으로, 혹은 그녀의 회사 인테리어로 최첨단 유행 패션을 끊임없이 선보여주지. 덕분에 뉴욕은 매혹적이고 세련되고 때로는 유쾌한 도시로 우리에게 다가와.
그러나 나에게 이 영화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점은 처음에 말했듯이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그 애가 어느 날 킹카, 혹은 퀸카가 되어 나타난다는 기분좋은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이야. 사실 누구나 그런 상상 한번쯤 하잖아. 그래서 ‘아이러브스쿨’이나 ‘다모임’같은 동창회 커뮤니티에도 들어가고 동창회 모임에 나갈 때도 여러모로 신경쓰고 오랜만에 만난 그 애의 발전된 모습에 설레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연인이 된 친구들도 찾아보면 주변에 많을 거야. 그러니까 연인도 없이 허전하고 쓸쓸한 연말이라고 집에서 컴퓨터로 게임이나 하고 고스톱이나 치면서 시간을 죽이지 말고 어서어서 동창 모임을 수소문 해봐. 혹시 알아? 내가 혹은 나를 짝사랑했던 친구가 왕자님, 공주님이 되어서 나타날지.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도 이런 멋진 동창을 만나게 될거라고 믿을거야. 무엇보다도 믿음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