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어디에요”하면, 으레 우리는 “이리 꺽어! 저리 돌아!”하며 위치를 가이드해준다. 그럼 찾는 이는 별다른 장애 없이 쉽게 그곳까지 당도한다. 하지만 프루트 첸 감독이 애용하는 화장실을 찾자면 솔직히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영화에서는 동서남북을 확연히 가르는 나침반대신 겨울날씨에 서리가 끼어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나침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화장실은 더러운 장소라는 인식과 함께 아울러, 가장 은밀한 자신만의 공간으로, 느긋한 편안함이 제공되는 낙원이기도 한다. 저 멀리 중국인들 역시 인생의 유유자적을 즐기는 공간으로 그곳이 애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장으로서 화장실은 존재한다. 구획화되어 있는 칸이나 문은 애당초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집 안방처럼 변소를 생각하는 이들이기에 놀랍게도 아기의 첫 울음소리마저 화장실에서 울리는 때가 왕왕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못지않은 신화를 지닌 그들 중 한명이, 영화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화장실의 신’ 동동(아베 쓰요시)이다.
김선박은 동동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갖기 전, 자신을 수산물(水産物)이라고 소개하는 UFO와 같은 소녀를 만난다. 헌데, 소녀는 엑스레이를 찍어 본 결과, 자신의 말마따나 실제로 연골동물인 오징어마냥 뼈가 없다. 또한 김선박의 친구인 조(조인성)는 마흔까지밖에 살지 못한다는 희귀병에 걸려 동동이 살던 북경으로 치료약을 구하러 떠난다.
영화는 국적을 달리 하는 한.중.일 청년들을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등장인물로 기용하며, 공간 역시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풍경(여섯 개의 도시)을 화장실을 기점으로 담아낸다. 그렇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다큐적인 기법과 기승전결의 무의미함, 상징적인 장치들, 비순차적인 장면과 장면의 연결로 인해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는 그다지 매끄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기에, 일정정도 영화를 보는 방식에 대한 상식을 조금은 허물어트리고 관람에 임하는 것이 영화와 자신을 위해 좋을 것이다.
<화장실이 어디에요>는 전언했듯, 각국의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얘기이다. 허나, 그들의 얼굴에서 상심이 가득한 어두운 표정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프루트 첸 감독은 이들의 길 떠남을 통해 다른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똥과 오줌으로 그득한 화장실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주라는 사실. 당구에 삼라만상이 오롯이 투영되어 있다면, 변소는 더욱더 그러한 사실에 한발 짝 더 나아간 매개체이다.
인간의 먹고 싸는 문제는 거스를 수 없는 불변의 원칙이고, 태어남과 죽음 역시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섭리다. 세상이 제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이러한 순환의 법칙을 뜯어서 고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기에 화장실에서 태어난 동동이나 그곳에서 편안히 똥 누다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의 모습, 다양한 국적의 청년들이 젊음 날을 소진하며 화장실 토크를 벌이는 을씨년스러운 풍경 등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낯설게보다는 여느 일상사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프루트 첸 감독은 단순히 화장실을 배설물의 저장소로 쓰이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을 똥뚜간에서 퍼 올려,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기제로 읽히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실 똥과 오줌의 굵기와 형태, 색깔, 양에 따라 우리는, 자신의 심신을 상당한 수준까지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감독의 의도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 꽤나 설득력과 진정성이 배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감독은 오만가지 은유적 도구들을 배치하고,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환타지 한 장면까지 포개는 남다른 열정을 영화 속에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미 전언했듯, 감독의 사유를 펼쳐 논 지도를 매핑하기란 고도의 정신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홍콩 반환이라는 시대적 처연함을 <메이드 인 홍콩>, <그해 불꽃은 유난히 화려했다>, <리틀 청> 삼부작을 통해 감독은 잘 묘파해낸 적이 있기에, 그의 의식과 역량을 간편하게 재단할 수 만은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의 사고방식에 동조할 의무 또한 우리에게는 없다. 결정적 몫은 언제나 그러했듯 보는 이가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굳이 줄거리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대신 영상에 주목하시길 바란다.
<화장실 어디에요>는 아시아의 합작영화이다. 후에 이 점으로 인해 영화는 자주 거론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감독은 잘 알고 있기에, 영화를 작업하면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하여튼 영화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인 프루트 첸은 분명, 향후에도 계속적으로 주시할 필요가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