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턱시도에 잘 관리된 말끔한 외모를 가진 스파이. 원조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그는 하드코어 락 그룹 람스타인이 ‘Feuer Frei!’를 강렬하게 연주해대며 완전히 분위기를 장악하는 공연장에서 총을 맞고 비명 소리 한번 내지도 못한 채 거꾸러진다. 그의 망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열광하는 관중들 위로 추락하여 이리 저리 휘돌리며 슬램 서핑의 제물이 된다. 물론 그의 미션 달성의 결과물이었을 성 싶은 칩도 도로 빼앗긴다. ‘전통적인 스파이의 시대는 이제 쫑이다!’ 라고 선고하는 듯한 <트리플 X>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토록 야심만만하다. 또한 그것은 <트리플 X>가 수많은 선배 첩보 액션 영화와의 분명한 차별점을 그으려는 지점이기도 하다.
‘X’자 3개로 이루어진 <트리플 X>를 이루는 요소들. 첫번째로 ‘Xander Cage’라는 이름을 가진, 복종과 획일화된 이미지를 거부하는 익스트림 스포츠 매니아 혹은 빈 디젤 그 자체. 두번째로 ‘X-게임’이라 일컬어지는,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도 묘기를 펼치는 각종 위험천만한 스포츠 액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태도 또는 스타일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eXtreme’한 에너지와 아드레날린의 제대로 된 분출이다.
X-게임계의 국제적인 영웅 젠더 케이지(빈 디젤)는 자신의 전작 <분노의 질주>에서 방금 도착한 듯한 모습으로 손쉽게 상원의원의 삐까번쩍한 페라리를 훔쳐내고 200미터 높이 다리 위에서의 자동차 번지를 행하는 아찔한 광경을 인터넷 생중계로 내보낸다. 그는 새로운 비밀요원을 원하고 있었던 기븐스(새뮤얼 L. 잭슨)의 수많은 테스트 과정을 거치며 오토바이 하나로 헬기의 집중 포격을 무찌르는 숨이 멎게 할 정도의 스턴트 액션과 오히려 그러한 극한 상황을 ‘딱 내 취향이구만!’이라고 일갈하며 슬슬 즐겨보려는 내추럴 본 스파이로서의 본성, 게다가 부상당한 동료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려고 하는 의리마저도 차례 차례 증명해 보이고 언제나 그렇듯 수석 통과자가 된다. 이제부터 일이 진행되는 순서는 뻔하다. 미 국가안보국 NSA에 채용된다. 그 다음엔 체코의 프라하에 급파된다. 역시 정해진 수순으로 그곳엔 평화로운 세계를 몰살하려는 계략을 품은 반정부주의 악당 요기(마톤 소카즈)와 그 일당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다. 그 본거지로 잠입하여 악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옐레나(아시아 아르젠토)를 구하고… 이하는 생략하겠다. NSA 요원이 한 무더기의 비밀 병기를 주는 것까지, <트리플 X>는 첩보 액션 장르의 전통을 가져오는 전제 하에서 주인공과 스타일의 혁신을 꾀한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빈 디젤은 돈값을 한다. 우리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브루스 윌리스와 아직도 맹활약중인 현 제임스 본드인 피어스 브로스넌과 심지어 이든 헌트 톰 크루즈까지 그 어떤 액션 히어로도 선보이지 못했던 스턴트에 가까운 강력한 액션 연기로 스크린을 주름잡는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오토바이에 손을 짚은 채 철조망을 날고(물론 슬로우 모션이다), 은빛 쟁반을 스케이트 보드 삼아 식당 난간을 미끄러져 탈출하고, 거대한 눈사태 바로 앞에서 먹힐 듯 먹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스노우보드 묘기를 몸소 펼치며 보는 사람들의 피가 끓어오르게 만든다. 마치 애국심이고 사랑이고를 떠나 근사한 문신이 새겨진 이두박근을 움직여 스릴을 만끽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스파이짓을 하는 단계에 오른 것 같다. 와우! 내가 아이맥스 영화관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다만, <트리플 X>의 세계는 완벽하게 마초적인 남성들만의 세계로 짜여진 판이며 롭 코헨 감독의 전작인 <분노의 질주>에서부터 이어져온 울끈불끈 커다란 근육과 상대적으로 왜소한 뇌를 가진 남성 주인공, 그리고 그에 딸린 장식품이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 여성의 모습은 여전하다는 것은 말해 두어야 겠다. 롭 코헨의 세상에서 여성들은 노출이 심한 패션과 한껏 섹시한 포즈로 몸을 꼬고 있다가 사업상의 일들을 치루고 돌아온 남성들의 품에 안겨 그들의 휴식을 돕는 피로 회복제 같은 모습이다.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이며, 한 성질 할 것 같은 여주인공 아시아 아르젠토마저 처음 보여줬던 도도한 콧대를 꺾고 자진해서 다가와 키스함으로써 우리의 뉴 히어로 젠더 케이지에게 굴복한다. 그의 순정에 감동한 것일까.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눈부신 보라보라 섬 해변. 어느새 ‘XXX걸’로 길들여진 옐레나가 선탠 오일을 발라주는 끈적끈적한 손길을 즐기며 흐뭇한 휴가를 즐기는 젠더 케이지의 망중한. 하지만 어김없이 울리는 벨소리와 함께 새로운 미션을 받는 - 2004년 오픈될 < XXX 2 >를 예고하는 - 장면을 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007>과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첩보 액션 장르의 클리셰가 드러난다. 절반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