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토커>는 말이 필요없는 액션 영화의 대들보 오우삼 감독의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화려한 연출을 보여준 오우삼의 전작들의 명성에 가리워져 오우삼 영화같지 않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윈드토커>는 정말 ‘오우삼’ 영화일까?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암호가 계속 누설되자 미군은 새로운 암호를 고안해낸다. 바로 나바호 언어. 나바호족 인디언들만이 알고 있는 언어를 암호로 채택한 미군은 나바호 인디언들을 암호병으로 훈련시켜 전쟁에 투입시킨다. 전선을 지키키 위해 끝까지 후퇴명령을 내리지 않아 전우들을 죽게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조 앤더스 중사. 부대에 북귀한 앤더스는 나바호 암호병 야흐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지만 실제 그의 임무는 암호병의 보호와 동시에 적군이 암호를 해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암호병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그를 사살해서라도 암호를 지켜야 하는 진실을 담고 있다.
오우삼은 <윈드토커>에서 관객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 차근차근 그 실상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화려한 덧붙임도 과감한 생략도 없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1억불의 제작비가 투자된 전투 장면들은 사실적이지만 긴박감이 없다. 전쟁 영화로써는 너무 잔잔하게 느껴질만큼 단지 리얼리티에만 충실하게 묘사된 전투들과 병사들의 죽음은 비장함과 공포보다는 안타까운 한숨이 나오게 한다. 마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안타까워 하는 것처럼. 참혹한 전쟁의 참상들을 이미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 호크 다운>에서 경험할 만큼 경험한 관객들은 <윈드토커>에서 다른 전쟁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기대하지만, 이번 만큼은 오우삼도 관객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충실하고자 한다.
<윈드토커>가 오우삼의 전작들과 다른 또하나의 사실을 바로 ‘영웅’의 부재라는 점이다. 이제 몸이 무거워 보이는 니콜라스 케이지는 흐린 눈빛으로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야흐지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임무로 인해 고뇌하지만 오우삼의 전작들속에서 보여지는 ‘영웅’의 모습은 아니다. 가족이나 우정,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싸우는 기존의 주인공들에 비해 앤더스는 오히려 전우들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기 위해, 혹은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 죄씻김을 위해 전쟁터에 나간다.
그러나 역시 오우삼이라고 할 만한 점은 있다. 바로 사나이들의 ‘우정’. 많은 남성 관객들에게 영원히 사랑받을 만한 이 소재를 다루는 오우삼 스타일의 이야기 솜씨는 <윈드토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자신들의 임무 때문에 나바호 암호병들과 거리를 두려는 앤더스와 옥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나바호 암호병들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는 장면은 영화의 비극을 예고하지만, 그들의 우정은 죽음의 공기로 가득찬 전쟁의 한복판에서 인종과 편견을 뛰어넘고 하나가 되고,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마음에 흡입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은 우정…오우삼의 코드는 영원하기에 <윈드토커>는 역시 오우삼의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