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an2000의 개막작으로 메리 해런 감독의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hycho)]가 상영됐다. 브렛 이스턴 엘리슨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이미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깔끔하고 잘생긴 여피족 패트릭 배이트먼(크리스천 베일)이 살인의 늪에 빠져 점점 더 잔혹한 연쇄살인범으로 돌변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훌륭한 외모와 멋진 집을 소유한 일류대 출신의 인텔리전트 배이트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외양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는 늘 최고급 의상을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의 뒷골목에서 시작된 살인의 쾌감이 그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변태적인 섹스와 욕구 해소용 살인이 수십 명에 달하게 될 때쯤 배이트먼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엄청난 살인자라고 알리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물질적인 욕망이 팽배한 지난 8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도취에 빠지는 주인공 배이트먼에게선 오만한 미국의 자존심을 보는 것 같다. 살인을 저지를 때에는 차분하고 냉철한 반면 남이 내민 고급명함 속에 '달걀무늬(?)'가 박힌 것에 대해서는 살을 부르르 떨며 역겨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다. 배이트먼은 수십 명의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의 범행을 주위에 알린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주위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전혀 믿지 않는다. 설사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안다고 해도 오히려 살인자의 껍데기를 벗겨버려서 멋진 여피족으로 되돌려 놓을 판이다. 결국 주인공 배이트먼은 겉은 화려하지만 추악한 욕망을 속에 지닌 '표리부동'아메리카의 형상화라고 볼 수 있다.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아메리칸 사이코]는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6)'로 데뷔한 매리 해런이 연출을 맡았다. 그녀는 가학적인 섹스와 폭력, 살인이 난무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추악한 욕망을 블랙코미디를 섞어가며 깔끔하게 그려냈다. 애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에드워드 노튼, 이완 맥그리거 등이 물망에 올랐던 배이트먼 역엔 '태양의 제국'의 어린 모습에서 훌쩍 커버린 크리스천 베일이 맡았다. 아역배우 출신인 그가 성인이 된 후 '작은 아씨들', '벨벳 골드 마인' 등에서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본격적인 그의 연기력을 과시한 작품으로는 [아메리칸 사이코]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작품에서 깔끔한 여피족과 연쇄살인범 사이를 오가는 연기를 훌륭히 소화해 냈다. 캐스팅 과정 중 감독 매리 해런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적극 추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크리스천 베일은 어린 시절엔 주목받다가 성인 연기자가 된 이후 빛이 바래버린 다른 연기자들과는 철저하게 다르다. 이제서야 그는 물을 만난 것이다. 추악한 욕망의 모습으로 대변되는 영화[아메리칸 사이코]. PiFan 2000의 시작을 알려준 작품으로서는 무난한 편이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미국에서는 이 영화가 잔혹하다고 난리를 쳤다는데, 부천에서 이 영화를 보면 그다지 난리칠 일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