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점유율 40%라는 전대미문의 신화를 달성했던 한국 영화계는 올 해 들어 주목할만한 대어를 건져올리지 못하고 있다. 기획 부재와 천편일률적인 소재, 대중의 감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낡은 감성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한 발짝 끌어내리는 결과로 나타나,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들의 열풍이 거센 여름 극장가에서 조용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비천무]의 흥행 성공 때문이 아니다. '하드보일드 액션 릴레이'를 표방하며, 단편영화 4편을 묶어 장편으로 완성해낸 재기발랄함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완성한 류승완 감독에게 거는 기대감 때문이다.
개봉 전부터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류승완 감독은 그야말로 게릴라적 전술로 폭력의 새로운 서사시를 완성했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촬영이 끝나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주축으로, 자비 400만원을 들여 97년 단편 [패싸움]을 만들고, 이후 게릴라적 전술로 완성한 또다른 단편들을 이어붙였다. 이와 같은 제작 방식에도 불구하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연대기적 구성에 대한 감독의 주도면밀한 시선에 의해 단편들의 조합에서 빚어질 수 있는 서툰 감성을 떨쳐내고, 폭력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처절한 감성으로 가득한 영화로 완성되어 제작비와 영화적 재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또 하나의 좋은 사례로 남게 되었다.
3년 이상의 제작기간을 통해 만들어진 각 4개의 에피소드들은 릴레이적 속성을 띠며, 영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도록 이끈다. 각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인물들 사이에는 미묘한 연대감이 흐르고, 각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고유한 장르적 특성은 다양한 속도와 리듬을 변주하며 완성된 이야기에 통일성과 활력을 불어넣는다. 각각 액션, 호러, 세미다큐멘터리, 갱스터 장르의 성격을 갖춘 4개의 단편들은 그 자체로서의 매력과 더불어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뻗어나가는 치기와 감성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는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와 같은 구성의 매력은 [세기말]이나 [펄프 픽션]처럼 잘 짜여진 구조를 위해 이야기의 잔가지를 변주해내는 방식과는 달리, 전체적 구성 안에서 별도의 새로운 감성을 표출하는 각 에피소드의 독자적 감성에 의해 신선한 충격을 제공한다.
폭력의 악순환, 폭력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변주를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남성적 힘이 가득한 영화로 완성한 류승완 감독은 감독/각본/주연/무술감독까지 두루 소화하며 전천후 예술가로서의 끼를 무한히 드러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유머와 재기를 잃지 않으며 폭력의 처절함을 말하는 감독의 시선은 분명 쿠엔틴 타란티노를 연상시킨다. 그가 포스트 타란티노 세대를 이끌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는 것도 이러한 재능 덕분이다. 하지만, 그는 타란티노와는 분명 다른 노선에서 헤모글로빈을 포착한다. 타란티노가 날 것 그대로의 폭력을 유쾌한 시각으로 조명하며, 폭력 뒤의 낭만에 취하게 만드는 것에 비해 류승완 감독은 이소룡과 성룡, 주윤발과 오우삼으로부터 물려받은 폭력의 시각적 쾌감을 계승하면서도 낭만을 과감히 떨쳐낸다. 유머 가득한 구성은 타란티노로부터 편승한 유사 헤모글로빈 영화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만, 적절히 완급을 조절하며 폭력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눈은 류승완 감독이 거둔 성과라 할 수 있다.
소박한 제작비 탓에 지나치게 소박한 액션 장면은 폭력이라는 힘의 세계에 대한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하며, 처절함의 세계를 구현한다. 스펙터클한 액션이 폭력을 신화화하는 것에 비해 류승완 감독이 그려내는 폭력은 처절할 정도로 인간적이다. 뛰어난 연기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기자들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인물들은 그야말로 현실 위에 존재할 법한 인간들이다. '대상화된' 폭력이 아닌, '숙명적인' 폭력은 소박한 감정을 이입하며, 거꾸로 살 냄새 풍기는 묘한 하드보일드를 완성한다.
애써 멋을 부리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유독 빛나는 스타일은 디테일과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더불어 반가운 것은 주제와 이야기에 대한 강박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90년대 한국의 젊은 감독들에게 고질병처럼 찾아든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운율은 이야기의 매력을 한층 일깨운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영화광의 젊은 치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류승완 감독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흔히 말하는 '영화광을 위한 영화'가 아닌, 보다 친숙하게 우리를 사로잡았던 성룡, 주윤발, 오우삼의 영화들과 동시상영관을 전전하는 싸구려 영화들에 바치는 애정이 수줍게 표현되어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형식과 미학에 대한 깊이있는 애정을 추구하는 류승완 감독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은 단지 그가 젊기 때문이 아니다. 폭력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너비를 드러내는 시선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작가' 또는 '대중감독'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구분 가운데에서 이러한 도식을 떨쳐버릴 재능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부디 그가 다음 작품에서도 그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