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음흉한 [나쁜 남자]가 그 텁수룩한 몸뚱어리를 세상에 드러낸 지도 어언 3달이 넘어간다. 그 동안, 한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의 의식 속으로 성큼 덤벼든 배우 조재현과 한국 영화계의 독특한 '현상' 김기덕 감독에게 쏠린 세간의 이목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각종 영화 관련 매체에서 [나쁜 남자]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영화에 대한 논쟁은 점점 번져나가 그 테두리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평론가들끼리 이 영화의 정치적 성향('계급'이며 '여성'을 들먹거리며)이라든지 표현방식에 대해 꼿꼿한 목소리로 갑론을박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정신과 의사가 영화의 무의식을 캐내어 보겠노라 곡괭이 들고 달려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영화를 다른 장르의 문화에 치환시켜 늘이고 줄이고 꼼꼼 뜯어내려는 가상한 노력을 보였다. 다들 정색을 하고 이토록 맹렬하게 돌진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니, 막상 [나쁜 남자]를 낳은 김기덕 감독이 설레설레 말문을 닫아버린 이유도 어쩌면 알 듯하다.
부산 영화제 기간부터 남포동 거리에 너울대는, 서원의 가녀린 뒷모습이 콕 틀어박혀 농염한 습기가 짙게 배어나는 영화 포스터에서 애써 눈 떼며, 이 영화만큼은 정말 못 볼 것 같다고 '지 애인 창녀 만드는' 에라이 천하에 몹쓸 놈 이야기를 어떻게 견뎌 내느냐고 삐죽삐죽 극장을 피해 다니기만 했던 내가, 그래도 봉긋 솟아오르는 호기심과 한국 영화에 대한 의무감에 차마 주춤주춤 그 나쁜 놈 구경하러 극장에 들었던 건 작년 12월. 두 시간 남짓 꾸역꾸역 영화를 삼킨 나는 목울대를 타고 내리는 시큼한 멍울에도 불구하고 대뜸 내 놓을 말이 없어 쓴 웃음만 한 모금 머금었더랬는데.
어떤 (여성)평론가들은 김기덕 감독이 고수해 온 '창녀'와 '성녀'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또(!) 발견하고 흉흉한 반감을 표시하며(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여성은 반짝 깨이지 못하고 남성의 시각에 푹 퍼진 여성에 불과한 걸까 의구심을 갖게도 하고), 어떤 평론가들은 대학생인 선화가 창녀로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가파른 계급적 의미를 읽기도 한다. 영화가 드러내는 잔혹한 '폭력'의 속셈은 뭘까 머리 맞대고 속삭속삭 궁리하고, 비논리적인 이야기 구조는 또 어떤 울창한 속살을 품고 있지나 않을까 끊임없이 물음표를 떠올린다. 영화계를 주름잡는 그들의 담론을 나는 차용할 생각도 반박하거나 동조할 생각도 없다(흥미롭긴 하지만). 그러려면 영화를 자로 재고 모로 보고 잘금잘금 조각내야 하는데, 내게 이 영화는 단지 둥실 모호한 심상으로 떠 있기 때문이다. 가닥이 설기설기 집혀서 끈질기게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영화가 있는 반면, 가끔은 [나쁜 남자]처럼 멍청하게 흩어져 마냥 헤벌레 게을러지는 영화도 있다는 구차한 변명.
이렇게 무책임한 리뷰는 처음 써보는 것 같다. 송구스런 마음에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김기덕 감독 영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모조리 언급하려면 범위가 종잡을 수 없이 커지니까) 비릿한 암내와 끈끈한 향내가 동시에 풍겨나는 '악몽'이다. '꿈'이란 이성의 세계에서 정립될 수 없는 나름의 논리체계를 지니므로, [나쁜 남자]에 메스를 들이대 반듯하게 잘라내는 일은 도저히 무리다. 악몽은 괴롭고 슬프지만 거뭇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전적으로 맑고 명료하지도, 착하고 곱지도 않은 이상 '나쁜 꿈'의 음험한 매력은 언제나 우리 뇌 한켠에 도사리고 있다. [나쁜 남자]는 그 꿈을 애매하게 뒤흔들어 비추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후다닥 도망치고 싶게, 어쩌면 코 박고 탐닉하고 싶게. 그러나 단, 이건 내 경우에 한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