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범세계적인 이상을 찾는 것이라면, 웃음은 만국공통어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그런 것. 서로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웃음은 긴장을 풀 게 하고, 사람과 사람간의 벽을 허문다. 어깨동무를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만큼 친구들의 우정을 독독하게 하는 것은 드물다.
종교가 우리의 영혼을 위한 것이라면, 웃음 역시 그렇다. 웃음이 원래 우주적인 것이란 사실을 가르쳐주는 이들은 많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마하리쉬 마헤티와 함께 살아 있는 3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정신적 구도자 오쇼 라스니쉬는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였던) "배꼽"이란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배꼽"을 비롯한 그의 저서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주적인 웃음을 던진다. 밀란 쿤데라의 여러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조폭영화 운운할 필요 없는, 재미있는 영화
업소의 주도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이던 '재규' 일당은 되려 무지막지한 습격을 당하고, 깊은 산중의 암자로 몸을 숨긴다. 더이상 숨을 곳도, 보살펴 줄 조직의 힘도 끊긴 재규 일당에게 유일한 보금자리가 될 그 곳엔 자비와 진리를 수행 중인 스님들이 살고 있었으니 그 동안의 모든 일상을 뒤집는 느닷없는 인연은 고요했더 산사를 흔들기 시작한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재규 일당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스님들은 약속한 일주일의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고, 보스의 연락만을 기다리는 재규 일당의 심정도 편치만은 않다. 절 생활의 무료함과 초조함을 달래기 위한 재규 일당의 일과는 사사건건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고 이들을 내쫓고 평화를 찾기 위한 스님들의 눈물겨운 대책은 기상천외한 대결로 이어지는데...
욕심 부리지 않고, 중용을 갑니다
우선 영화 내내 관객을 둘러싸는 우리 산하와 산사의 풍경이 정겹다. 영화의 소재로 굳이 절간을 택한 데는 분명 모종의 설교 목적도 있을 터, 그러나 영화는 관객에게 깨우침을 강요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요소요소에서 빛을 발하고, 절제된 액션은 유려하다. 박철관 감독은 신인감독이 빠지기쉬운 함정 또는 유혹을 사뿐히 건너뛴다.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버리고, 간결하고도 조화롭게 중용을 가는 것이다.
오버는 없다. 그러나 빈약하지 않다. 그리하여 [달마야 놀자]는,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다케시나, 젠 채하는 거 못 봐주는 스콜세지(달라이라마의 전기영화 "쿤둔"을 만들었지 않은가!) 아울러 "소림축구"(정말 기대된다!)로 돌아온 주성치까지, 모두가 좋아할 영화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