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영문 제목이기도 한 ‘아줌마’가 공권력과 남성이 거부하는, ‘공정사회’라는 사회적 정의를 위해 악당을 처벌하는 과정. 그 속에서 영화는 아줌마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극적 장치를 총동원한다. 의욕도 능력도 없는 경찰,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는 남편, 무관심으로 이차 피해를 가하는 주변인들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영화적 수사는 과잉으로 가득하다. 성폭행당한 12세 딸을 둔 엄마가 경찰의 부실수사를 참다못해 40여 일간 서울, 경기도 일대를 돌며 범인검거를 주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영화는 잠시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범인과 아줌마의 몸싸움과 추격을 담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범행의 과정과 피해자의 기억으로 반복되는 플래시백까지, 장르적 구성을 의식한 플롯의 배치 또한 매끄럽지 못하다.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핸드헬드로 촬영한 인서트숏의 남용은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충돌을 상쇄시키지 못하고 서사의 불균질을 부추긴다. 아줌마의 감정에 동화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강렬한 복수가 카타르시스로 온전히 전이되지 못하는 이유도 아줌마의 무능력함이 적소에 배치되지 못한 탓이다. 상대적으로 무능력한 아줌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는 모양새가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아줌마가 무능력하게 보이기 일쑤다. 모든 상황이 답답하니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복수의 통렬함이 상쇄된 자리에는 주객이 전도되어 시각적 충격이 강한 인상을 남기고 만다. 강렬하지만 여운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다.
영화의 모든 것이 집중된 아줌마를 구현하는데 있어 장영남은 마음껏 현장을 뛰놀고 캐릭터를 요리한다. 영화적 수사의 과잉 속에서도 장영남의 연기는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복수극을 완성하는 일등 공신이다. 리얼리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감독의 시도가 효과적으로 구현되지 못한 아쉬움은 그래서 더 크게 느껴진다. 복수가 희망으로 치환되는, 그래서 현실을 더욱 직시할 수 있는 영화적 힘을 발휘했다면 <공정사회>는 <도가니> 이상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2013년 4월 15일 월요일 | 글_서정환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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