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실은 <대부>의 돈 꼴레오네 만큼이나 인정사정없는 인물이었음을 말이다. 그가 보여준 살 떨리는 부성애에 감탄해 4년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기억을 떠올려 보라. 이 남자는 지독한 워커홀릭에 동정 따윈 모르는 냉정한 요원(인간병기)이었다. 피를 동반한 그의 잔인한 응징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인되는 폭력이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악당’이었다면. 그랬다면 우리가 <테이큰>에게 느꼈을 감정은 통쾌함보다 처절함에 가까웠을 것이다. <테이큰 2>는 사람의 본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는 영화다. 브라이언의 ‘파괴본능’이 가족의 위기 앞에서 다시 폭발한다. 적에게 납치된 이후의 브라이언은 흡사 슈퍼히어로 같다. 복면에 포박된 채 끌려가는 상황. 청각과 방향감각과 촉감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 내는 브라이언은 ‘인간 내비게이션’이 따로 없다. 전화기 하나로 딸을 여전사로 변신시키는 능력은 또 어떤가. 그의 정체가 배트맨을 훈련시킨 ‘라스 알굴(리암 니슨)’ 이었다 해도 믿을 판이다. 리암 니슨이 전편에서 선보인 논스톱 액션에 매료됐던 관객이라면, 업그레이드된 규모만큼이나 강인해진 그의 액션 퍼포먼스에 92분을 60분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균형이다. 주인공은 진화했으나, 오합지졸 악당들은 도리어 퇴화해 버렸다. 깨져버린 균형아래 희미해진 건 긴장감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식으로 적을 섬멸해가는 주인공에게서 1편에서 느꼈던 인간적인 면모를 찾기란 쉽지 않다. 주인공이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보다, 악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더 초초해지는 이상한 현상이라니. “복수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영화 카피를 ‘올해의 카피’로 선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테이큰 2>에 필요했던 건 ‘아빠의 진화’가 아니라, ‘악당의 업그레이드’였음이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얘기하듯, <테이큰 2>는 <테이큰>(2008년)의 성공에 어느 정도 발목 잡히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전작보다 차기작에 오히려 더 포박당해 있는 영화라고 말이다. 흥행에 대한 부담이 덜했던 <테이큰>은 거칠 것이 없었다. 목표를 향해 무섭게 질주했다. 그것은 <테이큰>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테이큰 2>는 생각이 너무 많다. 악당과 싸우는 와중에 3편을 생각하느라 스스로를 제약한다. 뛰다가 만 격이다. 마지막 순간, 브라이언답지 않은 선택은 후속편을 위해 남겨둔 찌꺼기 같아 뒷맛이 텁텁하다. 그럼에도 <테이큰 2>가 추석에 즐기기 제격인 오락 영화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이다
2012년 9월 27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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