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랑전설>의 시대적 모델은 1960년대 일본의 전공투 세대이며, 과격파 반정부조직 ‘섹터’의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 ‘특기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기대의 별칭은 지옥의 파수견을 뜻하는 ‘케르베로스’이며, 각각의 부대에도 ‘셰퍼트’, ‘닥스훈트’ 등 개의 이름이 붙어 있다. ‘철저하게 복종의 희열을 주입당한’ 개는 법의 시스템 아래 집행되는 합법적인 무력을 상징하는 존재다. 그들의 행위는 단지 직업적이고 기계적인 일이어야 하고, 개인의 의사는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이다. 그 시스템에 속한 이상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가 윤리적으로 도마 위에 오를 일은 없다. 이는 역사를 통해 지겹도록 증명된 사례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나치의 유태인 학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인두겁을 쓴 악마가 아니라 근면하고 평범한 관료였다고 한다.(그를 나치의 악마성을 고발하는 선전용으로 삼고 싶어 했던 이스라엘 측은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두 개의 문>을 보는 내내 <견랑전설>의 특기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두 개의 문>은 독특한 영화다. 최소한 비슷한 맥락―소재만으로도 문제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여느 다큐멘터리에서 거의 본 적이 없는 접근방식인 것은 분명하다. 만든 이들의 심정적인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이 영화는 현상을 상징으로, 또는 상징을 현상으로 착각하는―둘 모두 맹목적이 되기 쉽다는 공통된 함정이 있다―반복적인 우행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냉정하리만치 말이다. <두 개의 문>에서 용산 참사와 재판 과정이 재구성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을 수 있고, 또 결정적인 토대가 되는 건 철거민들의 입장이 아니다.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경찰특공대원들의 증언이다. 처음으로 접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생생하고도 낯설었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위태롭게 들렸다.
평소에 그들은 전문가로서의 숙련도만을 요구받아왔을 것이다. 경찰공무원이라는 기계적인 관료제에서, 그것도 유사시에 폭력을 전문으로 취급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업무를 감안하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유사시’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기준은 매우 애매하고 변덕스럽다. 영화를 보고 나니 궁금해진다. 그리고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변해줄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긍지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그들에게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과오’를 추궁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도 결국 희생자였어” 같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민에 묻어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두 개의 문>은 특별하다. 그리고 국가와 법과 정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질문에 답을 내놓기에는 빈약하고 공허한 유령에 불과하다.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