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티풀 Biutiful>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Beautiful’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어느 언어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Biutiful은 Beautiful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쓴 언어다. 이는 고의가 아니다. 그저 어느 한 남자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 행위에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 그저 그 남자, <비우티풀>의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이 인식한 단어의 외형이 그러했을 뿐이다. <비우티풀>은 그런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마치 자신의 꿈을 해몽하듯 이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여정 안에서 점차 어떠한 의도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흐릿해진다.
알 수 없는 두 시퀀스의 연결을 통해서 시작되는 <비우티풀>은 그 불투명한 원점의 의미를 선명하게 밝히며 눈을 감듯 끝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불안이 영화 곳곳을 채운 몽타주들을 수집하다 이내 인물의 감정으로 파고들 때, 영화에 잠재된 수많은 비극이 제 머리를 들고 제 몸을 드러내듯 구체화되고 명확해질 때, 관객 대부분은 영화와 함께 시름하면서도 그 세계 자체를 둘러싼 기이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냐리투는 <비우티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영화적 해석이 개입하고자 했는데, 그의 변에 따르면 <비우티풀>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된 영화였으며 어느 공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비우티풀>은 온전히 이냐리투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인 셈인데, 이 영화는 그만큼 비선형적인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사유한다. 이 영화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에 자리한 어느 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삶 속에 자리한 어떤 하나의 생에 관한 이야기다. 규정된 언어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듯 규정에서 벗어난 언어가 때로는 더욱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규정되지 않은 언어처럼 쓰여졌다. 어느 한 남자의 삶으로부터 뻗어나간 영화는 결국 이 세계를 채운 어느 특별한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의 너비, 즉 죽음이라는 비극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 숙명의 너비가 저마다의 생으로 채워지고 모여서 이 세계의 형상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인과의 변형적 제시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는 화술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부조화가 이루는 특정한 리듬감, 이냐리투 특유의 화법과 묘사로 채워진 이 영화의 인장을 더욱 근사하고 명확하게 새겨 넣는 건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비우티풀>은 이냐리투의 영화이며 바르뎀은 그 세계를 완성하는 핵심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통해서 생존을 체득한 이가 체감하는 불행, 바르뎀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통해서 그 모든 생의 스펙트럼을 일거에 점령하듯 영화 속에서 걸어나간다.
<비우티풀>은 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 즉 죽음을 목격하는 방법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에 신비로운 사유를 더한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대구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처럼 잉태되고 종말된다. 그 끝에서 의미는 선명해진다. 삶을 정지시키듯 죽음이 찾아올 때, 그 정지된 삶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의 삶은 무엇으로 남겨지는가. 그 끝에 다다라야만 알 수 있는 물음. 하지만 당신의 삶은 어느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가치로 누군가에게 전승될 것이다. 삶을 이루는 건 ‘삶’이란 단어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규정할 수 없는 삶을 각자의 언어로 읽어나가듯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라진다.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 글_민용준 beyond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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