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근 감독을 처음 만난 건 2009년 서울독립영화제 사전감독모임에서였다. 그해 개막작인 <원 나잇 스탠드> ‘에피소드 1’에서 민용근은 시각장애소년과 색안경을 낀 여자와의 하룻밤을 통해 훔쳐보기를 멈추고 현실로 나오기를 요구한다. 감독의 전작 <도둑소년>을 인상 깊게 본데다가 개인적으로 세 편의 에피소드 중 가장 느낌이 좋았던 터라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각인되었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라인업에 <혜화,동>이 떴을 때 (많은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종로구 혜화동에 관한 에피소드거나 사라져가는 공간을 추억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더랬다. 그해 겨울 2010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작에 이름을 올린 <혜화,동>은 본선심사위원과 장편경쟁출품작이라는 타이틀로 그렇게 나와 다시 만났다. 3관왕을 독식하며 한해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한 영화의 감독답지 않게 폐막파티에서 그는 차분하고 겸손했다. 30대 중반 나이로, 독립영화에서 일정수준의 성취를 획득한 감독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2월 17일, <혜화,동>은 2011년 개봉독립영화의 첫 주자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언론시사 반응이 그다지 뜨겁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VIP시사 당시 디지털소스 문제로 상영이 중단된 사고도 있은 뒤였다. 시너스 이수의 첫 상영을 시작으로 감독은 거의 모든 상영관에서 GV를 진행했고 열 명만 모이면 어디라도 가겠다는 ‘찾아가는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하며 관객동원에 불을 지폈다. 아무리 자식 같은 영화를 위한 결행이라지만 이만한 강행군이 쉬운 일이던가. 그렇게 지난 한 달간 민용근은 가히 살인적 일정을 소화해냈다. 단편영화 몇 개로 유망주로 부상함과 동시에 인터뷰 매체부터 가리고 자신의 영화관련 행사조차 불참한 몇몇 독립영화감독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 물론 감독 혼자만 동분서주한 건 아니다. 주연배우 유다인과 유연석도 홍보를 맡은 인디스토리의 담당자도, 몸서리 처지도록 아팠을 스물 셋 혜화의 겨울만큼이나 쉽지 않은 시간을 쉼 없이 달려주었다.
흥행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렇게 오래 지속되기 힘들었을 일이다. 때론 텅 빈 좌석을 보면서 다리가 풀리고 마음이 무너져 내린 시간이 한 두 번이었을라고.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해준 건 흥행이라는 말초적 목표가 아닌, 자기 영화에 대한 애정과 찾아준 관객에 대한 진심어린 고마움의 발로였을 테다. 그 결과 유독 춥고 긴 겨울을 통과한 <혜화,동>이 1만 관객 달성 초읽기에 돌입했다.
개별 영화와 감독이 개봉기간 중 이토록 적극적으로 관객과 만난 사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많은 GV와 토크가 열렸단 얘기를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 즉 감독의 영화적 재능은 이미 부산과 서독제에서 검증 받은 터. 민용근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가교역할을 수행하면서, 개봉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질 또한 훌륭하게 입증해낸 셈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관객과 만난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각이 간절하고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 자들이 머리에 떠올라 화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감독을 비롯한 배우의 분투와 영화의 선전에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내자.
독립영화 1만 관객달성이 가진 의미는, 독립영화는 흥행불가라는 단순 셈법에 익숙한 극장의 횡포와 맞서 싸우는 동안 경향각지에서 찾아온 관객이 쌓아준 금자탑이고 훈장이라는 데 있다. 지난 한 달간 관객과 함께한 시간은 그야말로 박박 ‘기어서 건너가는’ 포월(抱越)의 여정이자 민용근 감독 개인의 작은 역사였을 터.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기에 완주를 우려할 수밖에 없었던 레이스에서 그는 끝까지 잘 버텨주었다. 그래서 고맙다. 지칠 만도 했을 시간인데 포기하지 않고 달려줘서. <혜화,동>의 1만 명 돌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글_백건영 영화평론가(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