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영화>는 주류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정씨 집안의 80년 가족사다. 그 시간동안 영화는 정씨 집안 3대를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에 주목한다. 1931년의 정길만(이상현), 1965년의 정학송(정승길), 1983년의 정태선(오우정)이 그들이다. 사실 이 영화의 시작은 1965년 정학송이다. 감독은 5년 전, 국제다방에서 만난 두 청춘 남녀의 소개팅을 그린 단편영화를 만든 바 있다. 제목은 <전쟁영화>. <계몽영화>의 등장인물 정학송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이 단편은 6.25를 경험한 1960년대 남녀를 통해 과거가 남긴 상처를 불러 세웠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유머로 풀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사가 22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녹아있었다. 평이 좋았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정학송의 윗대와 후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결국 감독은 정학송 이야기의 확장판을 <계몽영화>로 완성했다.
<전쟁영화>에서 시작된 <계몽영화>는 단편이 지닌 메시지를 그대로 계승한 가운데, 주제에 보다 깊이 있게 다가간다. 1대 정길만이 친일행각을 통해 권력을 얻는다. 그 권력을 계승한 2대 정학송이 군부권력에 빌붙어 부를 축적한다. 1대가 구축하고 2대가 쐐기를 박아 완성한 사회 주류로서의 지위를 꼭지점에서 향유하는 이는 3대 정태선이다. 그 시간 동안 이들 가족의 살림살이는 폈지만, 감정은 메말라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잘못 끼워진 단추는 시간이 갈수록 되 돌릴 수 없는 빈틈을 만든다. 조국을 배반했다는 정길만의 죄책감은 아들 정학송의 자격지심으로 발화된다. 그리고 정학송의 자격지심이 낳은 폭력은 딸 태선의 삶에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긴다. 선대의 잘못된 선택은 그렇게 후대에게 전이되고 반복되며 생채기를 남긴다.
이처럼 <계몽영화>에는 역사적인 과오의 시작과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과 그것이 낳은 비극과 잘못된 사랑 등이 촘촘하게 엮여있다. 동양척식회사, 삼양 라면, 티파니 반지와 카라얀 내한공연, 조기 유학 등 주류로 편승하기 위한 시대의 흔적들, 그 콤플렉스 덩어리에 대한 고증도 상당하다. 특히 영화는 현재의 뒤틀린 가족관계가 발화된 지점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널뛰기처럼 오가는데,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의 크로스오버가 매끄럽다. 저예산을 가지고도 3대를 아우르는 시공간을 허술하지 않게, 마치 예산 넉넉한 영화처럼 완성도 높게 찍은 건 이 영화가 지닌 또 하나의 재능이다.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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