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나 사귄 남자친구가 있다. 둘만의 기념일에 잔뜩 기대하고 나갔더니 반지 대신 귀걸이를 선물한다. 김이 팍 센다. 속으로 ‘왜 프로포즈를 하지 않느냐’며 몇 번이고 소리를 치고 싶지만 겉으로는 미소만 짓고 있다. 그래서 먼저 청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일랜드에서는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의 2월 29일에 여자가 먼저 청혼해도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결혼 못해 안달난 여자들 얘기는 관심사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히 결혼에만 목매지 않는다. 누가 청혼을 하는지도 중요하다. 무조건 남자여야 한다. 결혼하고 싶어 죽겠어도 남자가 청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애나(에이미 아담스)는 심장 전문의 제레미(아담 스콧)와 4년째 열애 중이다. 4년쯤 사귀었으면 프로포즈를 받아도 될 법한 시간인데 계속 소식이 없다. 그러다 둘의 특별한 기념일에 작은 상자를 받는다. 반지로 확신하지만 열어보니 웬걸? 귀걸이다. 그리곤 출장이라며 아일랜드로 떠나버린다. 애나는 프로포즈를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아일랜드에서는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 2월 29일에 여자가 프로포즈를 하고 남자는 승낙을 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일랜드로 향한다. 하지만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웨일스에 멈추고 만다. 29일까지는 무조건 제레미가 있는 더블린에 가야 하는 애나. 데클랜(매튜 구드)이라는 아일랜드 토박이에게 가이드를 부탁하지만, 두 사람은 시작부터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로에게 정이 드는 두 사람. 더블린에 도착한 애나는 제레미의 갑작스러운 프로포즈를 받는다.
<프로포즈 데이>는 여타의 로맨틱 코미디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프로포즈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여자는 남자친구가 보석상에서 선물을 샀다는 말에 들떠서 프로포즈 받는 연습을 하는가 하면, 윤년 2월 29일에 여자가 프로포즈를 해도 된다는 아일랜드로 가기 위해 악천후를 뚫고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가이드를 하는 까칠하고도 현실적인 남자를 만나 티격태격 싸우다가 정까지 든다. 결과는 어떻게 되냐고? 사실 이쯤에서 결과를 묻는 것도 섭섭한 일이지만, 그 결과를 빗겨가지 않는 것은 더욱 섭섭한 일이다.
물론 잘 만들어진 규칙을 잘 따라가는 것도 영화의 미덕 중 하나다. 모두의 예상을 빗겨갈 목적으로 반전을 만들거나 급작스러운 결말로 관객을 당황하게 하는 로맨틱 코미디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일 테니까. 최소한 <프로포즈 데이>는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중간 중간의 코믹한 상황을 적절하게 추가하면서 예상되는 이야기를 잘 다듬어준다.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다투는 애나와 데클랜은 자동차를 물에 빠뜨리고,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진흙탕을 구르고, 부부가 아니면 방을 줄 수 없다는 모텔 주인 앞에서 부부 행세를 하면서도 서로에게 으르렁 거린다. 하지만 덕분에 키스도 하게 된다. 키스 이후 서로에게 약간의 다른 감정이 생기는 두 사람. 서로가 주고받는 시니컬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서로를 알아가고, 비아냥과 장난 속에서도 아주 작은 몸짓이나 표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훈훈한 감정을 전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화에 공감이 어려웠던 부분은 4년간 사귄 제레미에 대한 부분이다. 제레미는 비열한 사기꾼도 아니고, 냉혈한 이기주의자도 아니다. 심장 전문의로서 경제적인 능력도 출중하고, (좀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애나를 사랑한다. 애나가 뜻밖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랑의 경험에 눈을 떴다 해도 4년간 잘 사귀었던 남자친구와의 결정적인 사건 없이 헤어지는 감정에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객관적으로 애나는 사랑은 물론, 조건도 다 갖춘 남자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솔직히 키가 좀 작은게 흠) 낯선 사랑,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랑에 이끌려 모든 것을 버린다. 뭐 좋다. 그게 로맨틱 코미디의 명쾌한 엔딩이라면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사랑은 머리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야’라는 식의 감정 앞세우기에 의한 결과라면 동의하기 힘들다.
<프로포즈 데이>는 데이트용 무비로는 손색이 없다. 재치 있는 상황과 대사에 몸개그도 작렬하고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도 준다. 할리우드에서도 이야기를 구상한지 한 달 만에 제작에 들어갔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너무 가볍고 흔하게 만드는 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미덕이라는 생각은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로포즈 못 받아 안달난 여자의 이야기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할 만한 이유와 전개는 필요하지 않나.
2010년 4월 2일 금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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