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예언자 Un Prophète>는 감옥영화의 마스터피스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2009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3월 7일 열리는 올해의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부문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될 만큼 독보적인 만듦새를 뽐낸다. 하지만 국내 관객들에게 자크 오디아르는 생소한 감독일 뿐 아니라 <예언자>가 거둔 국제적 명성에 비해 이 걸작영화를 향하는 관심은 소수의 팬에게만 한정된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지면을 자크 오디아르에 대한 간단한 소개이면서 <예언자>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관점에 관한 글로 채울 생각이다.
첫 번째 관점, 인간으로 대하기
<예언자>는 자크 오디아르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오디아르는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 Regarde les hommes tomber>(1994)로 데뷔한 이래 줄곧 범죄영화만 찍어왔다. 그에게 감옥이 배경인 영화는 언젠가 꼭 한 번은 다뤄야 할 소재였던 셈이다. <예언자>는 19살의 순진한 아랍청년 말리크(타하 라힘)가 감옥에 수감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범죄 집단의 거물로 성장, 석방되어 감옥을 떠나는 순간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니까 수감된 동안 말리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감독이 일차적으로 목적한 바다.
막 수감될 때만 하더라도 말리크는 백치 같은 소년에 다름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글도 익히고, 계산도 배우며, 직업 교육도 받는다. 무엇보다 감옥에서 살아‘남는’ 법을 획득한다. 조용히 지내다 사회로 나가려던 말리크의 계획은 코르시카 마피아 두목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럽)를 만나 완전히 뒤바뀐다. 아랍계 수감자를 살해하라는 협박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는 것. 말리크는 첫 번째 살인 이후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지만 이후 루치아니의 수하로 들어가 서서히 조직의 중요인물이 되어간다.
자크 오디아르는 범죄를 다루되 이를 순수한 장르적 유희의 관점이 아닌 삶의 급격한 전환을 이루는 계기로 묘사해왔다. 예컨대, <내 마음을 읽어봐 Sur mes lèvres>(2001)에서 갓 출옥한 주인공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예언자>에서는 말리크가 감옥 내 생존의 피라미드 맨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꼭짓점에 오르는 과정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감옥을 무대로 집요할 정도의 관찰을 통해 인간을 논하는 방식은 프랑스 감옥영화의 오랜 전통이다. <사형수, 탈옥하다>(1956)의 로베르 브레송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세세하게 묘사, 심리적 긴장감을 극대화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낸 것처럼 자크 오디아르 역시 사건이 아닌 행동에 방점을 찍어 말리크를 지극히 인간적으로 대한다.
프랑스 감옥영화가 인간을 묘사하는 방식은 할리우드 감옥영화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감옥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재소자에게 ‘인간’을 끌어내고 싶다면 할리우드의 감옥영화처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 죄수를 기존 사회의 전복을 꿈꾸는 반(反)영웅으로 즐겨 묘사하는 건 할리우드의 장기다. 그래서 할리우드 감옥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캐릭터에 가깝다. (그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7)는 뭐냐고? 감독이 체코에서 막 넘어온 ‘밀로스 포먼‘이었음을 기억하시라.) 하지만 자크 오디아르는 말리크를 절대 영웅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연출자의 관점을 철저히 배제한다. <예언자>는 말리크가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됐는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자크 오디아르는 관객들이 말리크에게 편견을 갖지 않도록 감옥 안에서의 상황만을 제시한다.
두 번째 관점, 사실주의로 바라보기
자크 오디아르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는 삶의 굴곡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진행 방향에는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오디아르 감독은 주인공이 원래 속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환경을 충돌시켜 서서히 변화해가는 인물의 삶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위선적 영웅 Un héros très discret>(1996)의 소심하고 조용한 남자는 영웅이 되고픈 마음에 레지스탕스 영웅이라고 입을 잘못 놀렸다 삶의 절벽에 다다르고 <내 심장을 건너뛴 박동 De battre mon coeur s'est arrêté>(2005)의 주인공은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폭력이 판을 치는 불법 부동산 세계에 발을 담갔다가 인간 실격의 신세가 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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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아르의 세계는 심리적 교통사고의 다발 구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인간의 성장과 삶의 변화를 논하되 극중 인물들을 특정한 환경에 몰아넣고 발밑으로 무수한 비극의 지뢰들을 깔아놓아 종국엔 파괴의 지경으로까지 내몬다. 그래서 그는 종종 범죄영화의 사디스트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자크 오디아르 왈,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데 있어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야말로 인간의 심리를 발가벗기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이는 그의 영화가 장르적 형태를 취하되 순수 장르영화와는 일정 정도의 거리감을 취하는 결정적인 태도다. 오디아르가 극중 주인공이 속한 세계에 대한 실제에 가까운 재현을 전제하는 건 이 때문이다. <예언자>의 경우, 말리크의 삶을 관찰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은 그가 수감된 감옥 환경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이를 위해 오디아르 감독은 자크 베케르가 <구멍>(1960)에서 택한 방식을 그대로 차용했다. <구멍>은 공들인 탈옥 장면과 함께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간성의 가치를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걸작의 지위에 올랐다. 특히 자크 베케르는 작품의 사실성을 위해 실제 사건이 벌어졌던 형무소에서 장면 대부분을 촬영한 것은 물론 탈옥에 가담한 적 있는 이들에게 자문을 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크 오디아르 역시 마찬가지로 수감 생활을 한 적 있는 닐스 아르스트럽을 루치아니 역에 캐스팅했고 전직 재소자를 고용해 영화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촬영 전 프랑스 여러 지역의 감옥을 찾아가 직접 접한 충격을 고스란히 <예언자>의 시나리오 속에 녹여냈다.
코르시카 마피아가 교도관들의 비호 속에 호화 생활을 즐긴다던지, 수감된 몸으로 비리 변호사와 내통하여 바깥의 조직을 다스리고 부를 쌓는 모습 등은 거짓말 같지만 자크 오디아르가 직접 목격하고 전해들은 프랑스 감옥의 현재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말리크는 인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악마 그 자체였으나 오디아르는 백지 같은 인물로 재설정했다. 환경은 인간을 지배하기 마련인데 하얀 도화지와 같은 말리크가 무법천지의 상황에 놓이면 생존을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눈에 띄는 성장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던 까닭이다. (오디아르는 전작에서 마티유 카소비츠, 뱅상 카셀, 로망 뒤리 등 스타 배우를 기용한 것과 달리 <예언자>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타하 라힘을 캐스팅했다. 관객이 어떤 선입견도 없이 말리크를 바라보도록 한 의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으로써 우리는 말리크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6년의 수감생활 동안 순진한 청년에서 조직의 거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는 말리크에게 우리가 들이댈 수 있는 도덕적 잣대란 감옥에서의 생존 규칙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를 감옥영화의 윤리에 대한 영화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성 싶다. 말리크는 오로지 살기 위해 살인하고, 동료를 고발하며, 조직을 배신함으로써 감옥에서의 윤리를 체화하는 인물인 것이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예언자>는 할리우드 감옥영화에 대한 안티테제 혹은 수정주의 작품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환경을 다루는 사실과 허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세 번째 관점, 순환론적 운명으로 이해하기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말리크가 감옥에서의 윤리학을 체득한 끝에 거물급 조직원이 되어 출소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해피엔딩?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다!) 인간승리? (전기(傳記)영화도 아니다!) 감독이 주인공에게 표하는 최소한의 동정심? (프랑스 작가들의 자존심을 아직도 모르나!) 이에 대한 질문은 사실적으로 흐르는 극 중간에 별안간 끼어드는 초현실주의적 장면의 의도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말리크가 감옥에서 처음 살인을 저지른 이후 피해자의 유령은 그의 곁을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름은 레예브(히켐 야쿠비). 코르시카 마피아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불리한 증언자라는 이유로 루치아니의 사주를 받은 말리크의 손에 죽게 된 인물이다. 레예브의 유령은 말리크가 심리적 압박에 괴로워할 때마다 불쑥 나타나곤 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거나 죄를 따져 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령은 말리크에게 있어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압박에 한줄기 불빛이나마 구원의 순간을 제공해주는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말리크와 레예브가 함께 함으로써 빚어지는 초현실적인 순간, 즉 산자와 죽은 자, 박해와 구원의 도상은 이 둘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넘어선 하나의 생사에 관한 은유로 빚어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말리크의 운명을 희미하게나마 점쳐 볼 수 있다. 말리크와 레예브가 같은 아랍계이면서 적대적이었던 것처럼 범죄 집단으로 구체화되는 감옥 안에서의 유대라는 것은 단지 편의상의 개념일 뿐이다. <예언자>가 그려내는 감옥 내의 코르시카 마피아 조직과 집시 마약상, 그리고 아랍계 범죄조직과의 관계는 사실 프랑스 주류에서 밀려난 이민족들이 형성한 그들 간의 피라미드에 다름 아니다. 다만 이들은 선택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결국 프랑스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의 순환론적 운명에 관한 영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장면이 말하는 의도는 결코 해피엔딩도, 인간 승리도, 그렇다고 감독이 자신의 인물에게 품은 동정심의 발로도 아니다. 오히려 말리크의 성장에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 장면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유령 레예브는 말리크의 운명을 형상화한 ‘예언’이 되는 셈이다. 안 그래도 이 영화의 제목은 ‘예언자’ 약간의 예언을 더 허용한다면, 말리크가 바깥세상에서 평탄한 삶을 이뤄낼 것 같지는 않다. 오디아르의 세계를 감안해 보건데 다시 감옥에 들어와 레예브처럼 애송이의 손에 목숨을 잃은 뒤 유령으로 나타나 또 다른 말리크의 운명을 예언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다만 그렇게 이들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고 해서 말리크 같은 인물의 인간적 가치는 논할 필요가 없는 걸까. 자크 오디아르는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언자>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말리크는 위대한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드러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다면 그 누구도 말리크의 삶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극악의 환경에서 잉태된 폭력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혜를 발휘해 삶의 본능을 지켜냈다. 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삶의 자세다.” 범죄자란 이유로 소외되고 도구시 당하는 수많은 말리크들에게 영화에서만이라도 인간의 가치를 복권시킬 필요성을 느낀 것. 그럼으로써 오디아르는 감옥영화와 같은 범죄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글_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