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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 | 2009년 9월 1일 화요일 | 김도형 기자 이메일


<고갈>은 ‘비타협영화집단 곡사’의 김곡, 김선 감독이 함께 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곡의 이름이 감독으로 올랐다. ‘김선보다 현장에 좀 더 많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빛을 낸다. 2001년 <이 사람을 보라>로 데뷔한 이후 장, 단편을 망라하며 정치적인 풍자와 사회를 비판하는 시각을 고수해온 이들은 <고갈>을 통해 표현 방법에서도 완전히 다른 개념을 선보인다. 단순히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표현 수위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영화에 맞는 이미지를 통해 영화를 보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의 영화 감상법을 제시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어느 때의 어느 곳. 마치 핵전쟁 이후 모든 것이 고갈된 듯한 갯벌에 한 여자(장리우)가 있다. 이 여자는 남자(박지환)의 소유물로, 단 돈 5만원에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몸을 팔고 있다. 틈만 나면 남자로부터 도망치려는 여자, 하지만 적극적인 탈주가 아닌, 두 사람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듯한 습관성 이벤트처럼 보인다. 여자를 소유했지만 진정한 지배자가 되지 못한 남자는 늘 여자에게 당하지만 스스로는 여자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던 두 사람 앞에 중국집 배달부(오근영)가 나타난다. 그녀는 여자를 데리고 함께 도망가지만, 여자는 다시 남자에게 되돌아온다. 며칠 후 돈을 내고 여자를 사는 배달부는 의식을 치르듯 격렬한 행동으로 여자와 섹스를 한다.

사실 내용을 다소 길게 설명하긴 했지만, <고갈>은 매우 단순한 내용을 갖고 있다. 매춘을 시키는 남자와 매춘을 하는 여자 앞에 중국집 배달부가 나타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로 요약이 가능하다. 확실한 내러티브가 있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인물들의 반복적인 행동과 무의미하게 주고받는 대화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들이 보여주는 것이 이 세상의 또 다른 축소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판적인 시각을 앞세워 혈기 왕성하게 맞서 싸우지는 않지만, 너무도 처연하게, 동시에 당연하게 그려내는 모습은 이 세상의 바닥이 어디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 대사가 많지 않은 이유는 거짓을 늘어놓는 혀가 아닌 진실된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매춘을 통한 섹스 장면은 물론 말 대신 트림을 하고 구역질을 하는 모습들은 <고갈>의 소통 방법이 나열되는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육체적인 고통 역시 이 사회가 주는 가장 사실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영향임을 보여준다. 몸이 안 좋으면 가장 약한 부분부터 그 증상이 나오듯, 이 사회가 병들고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징후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먼저 드러난다. 이것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가장 정확하면서도 솔직한 대화법이다.

그런 이유로 <고갈>의 표현 수위는 높다. 이미 영화등급위원회에서 한 차례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다. 특히 문제가 됐던 TV 화면의 수간 포르노 장면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장 강도가 높은 장면이다. 하지만 정작 감독은 이러한 장면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자신이 아니어도 영화의 표현 방법은 어느 정도의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됐다는 것. 그리고 그 표현 자체가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보여주는 방법이고,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필요하다는 얘기다. 단순히 섹스 장면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높은 굴뚝이나 자신의 배와 성기를 가위로 자해하는 배달부, 유두를 자르고, 사산을 하는 등의 강렬한 장면은 이 사회와 이 사회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대한 ‘어떤’ 시선도 품고 있다.

<고갈>을 주목해야할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의도를 직관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감독은 이야기로 하는 표현을 넘어서 비주얼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가 담으려고 했던 이 사회의 밑바닥을 더욱 거칠게 표현하기 위해 8mm 필름을 통한 핸드메이드 작업을 감행한 것. 노출을 낮춰 촬영한 고감도 8mm 필름을 35mm 사이즈로 블로우업한 후 HD로 컨버팅하는 과정을 거쳤다. 블로우업 과정은 의도적으로 그레인을 크게 하는 방법으로 화면 입자 자체를 거칠게 만든다. 또한 의도적으로 오염된 약품을 써 화면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운드 역시 비전형적으로 만들었다. ‘음원을 상실한 불길한 앰비언스’를 기본 컨셉으로 소리의 상실이나 파괴, 생략 등의 방법을 통해 불안과 소멸을 드러냈다. 사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엄청난 노동력과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필름 위에 코드가 없는 8mm 필름의 특성상, 이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필름 하나하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총 184,320커트를 일일이 손으로 붙이고 자르며 편집했다. 이를 통해 <고갈>은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로 <고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영화 보기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과감하면서도 폭발력 있는 작업이다.

거친 영상과 사운드, 밑바닥 삶을 사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 <고갈>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낮은 곳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 모름지기 희망이란 바닥을 쳤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가치다.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침전이 계속될 뿐이다. 모든 것의 바닥을 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올라올 수 있는 희망을 얻게 된다. 그것이 이 사회에 대한 것이든, 인간 본위에 대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고갈>은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던 내러티브 중심의 영화 체제를 파괴하고 영화의 근본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보기의 기존 관습을 수정하는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다.

2009년 9월 1일 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영화의 다양한 소통법에 관심이 있다
-이 사회의 처절한 밑바닥을 경험하고 싶다
-평소 김곡, 김선 감독의 작품을 좋아라한다
-인내와 끈기의 화신, 끝까지 영화를 볼 자신이 있다
-제한상영가를 받았었다는 이유로 호기심만 가득하다면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동안 대사는 별로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영화란 이야기가 풍부해야 하는거 아닌가?
-영화제에서도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중간에 극장을 나간 관객이 수두룩했다
15 )
loop1434
과연   
2010-07-30 14:30
kisemo
잘 읽었습니다 ^^   
2010-03-19 21:23
nada356
왠지 거부감이 드는..   
2009-12-03 22:19
sasimi167
절규하는 저 표정~   
2009-09-23 08:46
mvgirl
작품성과 오락성간의 갭   
2009-09-05 11:58
ldk209
정말 끔찍하다...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2009-09-04 16:58
theone777
간접적으로 처절한 밑바닥을 경험해 보고 싶다.   
2009-09-03 23:28
justjpk
극과 극이네..   
2009-09-0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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