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죽을 뻔 했거나 죽음을 가깝게 경험한 사람한테서 종종 나타난다. 증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보통 환자는 삶의 의지를 잃는다. 절망에 익숙해져서 희망을 외면한다. 현실에 저항 할 힘을 상실한 채 자포자기 한다. 죽음은 그렇게 산 자의 영혼에 상처를 입힌다.

죽음들이 산산이 이어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애통한 일이다. 누구는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으로 민주와 반민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민주주의는 영원한 미완의 숙제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완성했을진 몰라도 본질까지 쟁취하진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는 그래서 끝이라기보단 시작이어야 하지만 거대한 죽음 앞에서 다시 새로운 가치를 말하긴 쉽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원통한 일이다. 정치적 타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시대가 낳은 영웅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선택한 영웅이었다. 영웅의 절명은 시대의 절망을 낳는다. 더 이상 무언가를 믿고 지지하는 게 힘겹게 만든다. 어쩌면 다시 겪게 될 절망과 좌절과 슬픔과 오열이 두려워서다.

장자연 씨의 죽음은 초라한 일이다. 그녀의 죽음은 추잡한 기득권의 이면을 손가락질했지만 진실은 흩어졌다. 죽음이 이토록 무기력하다면 사는 데 죽을 만큼 원통해 할 필요도, 사회에 죽기로 대들 이유도 없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두려운 일이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간 시대를 살아낸다는 건 힘겹다. 정치와 대중문화가 위로해줄 수 없다면 기댈 건 종교 뿐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는 맑지 않다. 힘 있는 목사는 돈 있는 자들을 위한 교회를 짓는다. 이젠 신에게조차 기댈 수 없다. 최진실 씨의 죽음은 허무한 일이다. 다 갖은 듯 보였던 그녀의 삶은 실상 허상이었다. 상처투성이였고 작은 손가락질 하나로도 죽음을 떠올릴 만큼 섬약(纖弱)했다. 유골마저 도난 당했다. 그녀의 죽음은 애써 산다는 걸 부질없게 만든다.

죽음들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좌절과 허무는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한국 사회는 정신적 외상을 연거푸 입었다. 우린 생각한다. 애쓰면 뭐하나. 민주주의가 무언가. 진실이 밥 먹여주나. 분노할 대상조차 찾기 어렵다. 사방에선 경제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 소리만 시끄럽다. 경제 전쟁이 났으니까 모두가 일사불란한 경제 병정이 돼야 한다고 종용한다. 그럴수록 우린 사회에 순응하며 살기도 어렵다며 사회에서 내쳐질까 두렵다며 점점 더 순종적이 돼 간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치료법은 희망이다. 환자한테 살아갈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싸울 만한 가치를 줘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희망을 적선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죽음 앞에 서게 된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알려주는 증거다. 살아있다면, 깨어 있어도 좋다. 깨어 있다면, 정말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아 있고 깨어 있는 게 희망이다. <공각기동대>의 웃는 남자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인용했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나는 귀를 막고 눈을 닫고 입을 막은 인간이 되려고 했다.).”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 글_신기주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