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며 판타스틱 영화제의 칸이라 불리는 시체스영화제에서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는 유럽영화 부분 실버 멜리에상과 베스트 특수분장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지금까지 선보인 공포영화 장르를 뛰어넘는 독특한 발상과 비주얼을 선보이며 기존의 공포영화 팬들은 물론 새로운 장르에 대한 호기심어린 팬들에게까지 지지를 받았다. 공포영화라는 외피를 두르고 관객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하는 영화는, 비주얼 쇼크에 의한 쾌감뿐만 아니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저리가 처지는 강렬한 경험도 선사한다. 또한 다른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라는 점도 높이 살만 하다. 혼란스럽고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현실의 잔혹함을 담는 영화는 단순한 공포 체험에 그치지 않는다.
한 소녀가 절뚝거리며 거리로 뛰쳐나온다. 극심한 학대에 시달리다가 탈출한 루시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보호시설에 들어간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이 컸던 탓에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는 동갑내기 안나. 안나는 무조건적으로 루시에게 애정을 쏟으며 함께 한다. 15년이 지난 어느 날, 평화로운 가정에 복수의 총을 겨누는 루시(밀레느 잠파노이). 과거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로 일가족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도착한 안나(모르자나 아나위)는 루시를 진정시키고 시체를 치운다. 하지만 복수 이후에도 루시는 끊임없이 환영에 시달리고, 안나는 그 집에 관련된 잔혹한 과거를 알게 된다. 그리고 안나 역시 루시와 마찬가지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세상과 통제된 공간, 알 수 없는 집단에 의해 고통 받는 안나는 결국 고통의 극한이 선사하는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15년간 이뤄진 학대의 고통, 잔혹한 복수와 그 뒤에 감춰진 거대한 진실. 영화는 스릴러의 기본 골격 안에서 공포영화의 비주얼을 보여주는 ‘쎈’ 영화다. 영화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공포와 고통을 한계치까지 몰고 가는 영화는, 영화 속 캐릭터와 상황을 통해 일말의 편안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고통의 정점까지 몰아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목적은 고통의 전달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되는 고통과 그 고통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고도 담겨 있다. 영화는 고통의 표현을 위해 고어영화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환영에 시달리며 팔과 등에 깊은 칼자국을 내거나 목에 베어 자살하는 장면, 손목을 써는(말 그대로 계속 썬다) 장면, 머리에 박힌 철심을 뽑는 장면 등은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장면의 연속이다. 심지어 얼굴을 제외한 모든 피부를 벗기며 기존 고어영화를 초월하는 극한의 비주얼을 선사한다. 하지만 <마터스>의 비주얼은 영화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을 통해 그려낸 우리의 일상적 고통과 폭력에 대한 시각이다. 현실보다 무서운 건 없다.
<마터스>는 육체의 고통을 정신으로 이겨내 도달하는 경지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속 표현대로라면 순교를 통해 사후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이러한 과정을 종교적으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스스로도 종교가 없는 그는, <마터스>에 대한 종교적인 해석을 지양하길 원했다. 비록 안나, 루시, 가브리엘 등 주요 배역들의 이름이나 순교와 해탈의 경지 등이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종교로 구원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가 없는, 시간과 장소를 규명하기 어려운 모호한 시점을 영화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마터스>에는 신이나 구원자가 없다. 종교를 대신하는 어떤 단체가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역할을 한다.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 인간에게 찾아오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법은 오롯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 거대한 가치를 얻게 된다.
영화는 고통을 이겨내고 얻게 되는 가치를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다. 고통의 표현에서도 잔인한 고문의 묘사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잔혹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고통을 넘어서는 정점의 순간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에서 순교자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종교적인 종착지로 볼 수도 있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고통에 대한 분노로 볼 수도 있다. 영화는 의존할 수 있는 절대자가 없는 세상에서의 고통을 그린다.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질적으로 와 닿는 고통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통 안에서 선과 악의 판단 기준도 모호해진다. 도덕적인 판단과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고통 속에서 나약해 지기 때문이다.
<마터스>는 고통의 정점에서 보는 천국을 ‘사후세계’로 표현한다. 인간 중 누구도 닿지 못한 경지라는 의미다.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안나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카메라는 안나가 보는 사후세계의 이미지를 담지만, 명확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안나가 마담에게 들려주는 귓속말 역시 관객의 해석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안나에게 사후세계를 듣고 자살한 마담을 통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너무나도 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거나 그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괴로움으로. 하지만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담의 행동은 정갈한 마음으로 사후세계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극한의 고통의 정점에서, 혹은 죽어서 알 수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결국 관객에게는 숙제로만 남게 된다.
파스칼 로지에 감독은 <마터스>를 통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4개월간 쓴 시나리오와 3개월간의 촬영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에너지를 한껏 뿜어냈던 그는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인 폭력을, 현대 사회와 연결시킨 확장력과 전형적인 공포영화 스타일을 넘어서는 참신함은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 평할 만하다. 두 소녀와 괴물이라는 동화적인 소재를 통해 끔찍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공간과 비주얼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영화의 주된 공간인 저택을 비롯, 밀실로 표현되는 지하와 여러 이미지가 뒤섞인 환영 등의 비주얼은 베누와 레스탕이 담당했다. 기존의 프랑스 영화에 비해 4~5배 정도로 많은 특수 분장을 진행한 베누와는 안타깝게도 <마터스>의 칸 상영 직후 자살하고 말았다.
잔혹한 영화에 적극적인 출연 의사를 밝힌 두 여배우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디올의 아시아 지역 모델인 밀레느 잠파노이는 환영에 시달리며 처참하게 자신을 자해하는 루시 역을 신들린 듯한 연기로 소화해낸다. 피부가 모조리 벗겨지는 고통을 경험하는 안나 역의 모르자나 아나위는 온 몸으로 고통과 해탈을 표현하며 열연을 펼친다. 특히 영화 후반 20분간 대사 없이 페이드 인/아웃으로 이어지는 폭력 장면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직접 고통을 겪는 듯한 사실감을 준다. 페이드인에서의 살 떨림과 페이드아웃에서의 안도가 반복되며 충격적인 점층 과정을 경험케 한다.
<마터스>는 극악무도한 잔혹함을 보여주는 기존의 고어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영화를 단순히 공포영화의 범주에서 생각한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고통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영화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했지만, 매일 보는 TV 뉴스나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도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가 끔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크게 자각하지 않은 사이에 우리 사회는 이미 고통으로 만연돼 있다.
2009년 7월 30일 목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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