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을 해왔다. 다만 매 작품 다른 작가들과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는데 <플란다스의 개> 손태웅, 송지호, <살인의 추억> 심성보, <괴물> 하준원, 백철현, 그리고 <마더> 박은교 작가까지, <플란다스의 개>를 제외하면 모두 봉준호 감독의 영상원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었다. 다시 말해, 봉준호 감독은 프로작가와 함께 일해본 적이 없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차기작 <설국열차>는 일종의 예외 같은 작품이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소설가가 참여한 까닭이다. <설국열차>는 현재 1차 원고가 나온 상태로 Sci-Fi와 환상문학 소설가로 잘 알려진 김보영(<7인의 집행관><종의 기원>)이 완성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설국열차>는 1986년 앙굴렘 국제만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동명의 프랑스 만화가 원작이다. 전 세계가 눈으로 뒤덮인 미래의 빙하기를 배경으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고 달리는 1001량의 기차에 탄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설국열차>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의 제작을 맡은 박찬욱 감독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ci-Fi 영화를 처음 작업하는 것이기도 했고 준비해야할 것도 많은 작품의 특성상 전문 Sci-Fi 작가를 물색해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단다. 그래서 국내 Sci-Fi 관련 작품을 살펴보던 중 둘은 동시에 김보영을 선택했다고 한다. <설국열차>에서 감지되는 감수성과 흡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김보영의 작품 특징을 살펴본다는 것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설국열차>의 대략적인 밑그림을 두루뭉술하게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라 할만하다.
최근 <7인의 집행관>을 인터넷 연재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김보영은 딱히 Sci-Fi에만 한정되는 작가는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보다 순수한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까닭에 마니아와 비(非)마니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적인 배경을 기반으로 하지만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특기할만한데 이는 한국어 대사 50%, 외국어 대사 50%로 이뤄진 다국적 등장인물로 <설국열차>를 구성하겠다는 봉준호 감독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김보영의 작품이 ‘인간의 조건’을 지향한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봉준호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설국열차>를 통해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고 밝혔다. 이는 김보영의 작품에서 항상 감지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공장의 연기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미래를 배경으로 한 <종의 기원>에서는 자연을 동경하는 로봇이 등장하고, 높은 곳에 산이 있어 등반하는 것처럼 <땅 밑에>는 지국(地國)이 있어 땅 밑을 하강하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의지를 긍정하며, <7인의 집행관>에서는 죽음의 땅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이를 통해 생과 사의 의미를 묻는다. <설국열차>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미래판 노아의 방주인 열차 안에서 오로지 살기 위한 목적 하나로 투쟁하는 군상들에게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김보영의 시나리오를 접한 후 과학적 배경 지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만 영화 시나리오를 처음 집필한 까닭에 소설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어 봉준호 감독은 과학적 배경과 아이디어는 살리겠지만 새롭게 시나리오를 각색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김보영의 색깔은 많이 지워지겠지만 그동안 척박했던 국내 Sci-Fi시장을 감안한다면 <설국열차>를 계기로 영화와 소설의 교류를 통해 판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2009년 7월 17일 금요일 | 글_허남웅(장르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