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의 출발점은 개인의 욕망이다. 개인의 욕망은 때때로 어느 개인의 의지로 돌파구를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면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제도적 결함을 이용한 조직적 대응과 결합할 때 윤리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알바니아에서 벗어나 벨기에에서 새로운 삶을 정착하려는 로나의 욕망은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전문조직에 의해 성사되고 또 다른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절차로 나아간다. 약물중독자인 클루디는 그 과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는 제거하기 쉬운 수단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은 양심과 충돌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죄의식은 윤리적 양심에 의해 죄의 발생을 억누른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닐 때, 타자와의 협의를 통한 공통분모의 잠재적 자산이 될 때, 개인의 양심은 공모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건조하고 서늘한 카메라는 인물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발생시키지도, 주입하지도, 포착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감정이 결여된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을 관찰할 뿐이다. 물론 대부분 로나를 향해있는 카메라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포착하며 극적인 변화를 가늘게 끌어당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최대한 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가능성은 없다. 단지 객관적인 판단과 관찰의 합의를 통해 상황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분석하거나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객관성의 눈높이가 <로나의 침묵>을 숭고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숨죽이듯 정적인 카메라의 고정적 시야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일차원적인 시선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인물의 심리를 관통한다. 마치 다큐적인 화법으로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고 스크린과 객석의 너비를 인식시킬 만큼 감정과 거리를 둔 시선을 통해 적극적인 감정적 몰입을 배제한다.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환경의 테두리를 점차 확보해나간다.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는 건조한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를 그 인물들의 심리를 결정짓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도달하게끔 만드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로나의 침묵>은 그 절제된 화법을 통해 종종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느와르에 가까운 범죄적 소재를 차용한 결과값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함께 과장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초점에 가까운 카메라의 시선과 연출이 영화의 현실감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음향 등의 효과를 배제한 채 무감정한 시선으로 사건의 과정을 응시하는 담담한 태도가 사건의 흐름 자체에 대한 예상이나 암시의 가능성을 가로막음으로써 연이어질 상황에 대한 충격을 무방비 상태로 체감하게 만든다.
<로나의 침묵>은 벨기에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카메라의 이동이 지극히 제한적인, 분명 다르덴 형제의 인장을 찍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전작들이 현실성을 등에 업은 인간적 가치, 즉 용서라는 테마로 마주한 인간의 화해를 담았던 것과 달리 <로나의 침묵>은 종교적 신비에 다다르는 구원의 경지로 나아간다.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던 클루디를 가엾게 여기다 끝내 애정으로 품게 된 로나가 결국 그의 못다한 삶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실로 비범하다. 비인간적인 욕망을 낙태시키고 인간적인 사랑과 윤리적인 신념을 새롭게 잉태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감상적 깊이를 선사한다. 연약한 육체로 강인한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몸처럼 정적이고 차분한 응시 속에서 발견되는 강인한 의지는 역설적이라 더욱 강렬하다. 그 차가운 시선이 피어내는 의지가 놀랍도록 따스하고 아름답다.
2009년 6월 4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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