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한테 통용되어야 하는 게 법 아니여. 없는 법을 만드는 게 그게 힘의 논리 아니여?" 촌스러울지 모르지만 속 시원하다. 그런데 촌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흔 평생을 대추리 들녘에서 땅을 일구고 산 촌부 방효태 할아버지가 정부와 공권력에 보내는 이 외침은 그러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공분이 담겨져 있다. <길>은 그렇게 한 평생 지키고, 가꾸고, 벗 삼아왔던 땅을 어이없이 뺏겨야 했던 이들의 회한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길>의 시작은 바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다. 이 74분짜리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이 너무 쉽게 잊어 버렸던 그 곳, 대추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2006년 5월 4일 대추리 대추초등학교가 무너지던 날, 이 나라의 군대는 경찰, 용역 업체 직원들과 함께 미국기지를 확장하겠다며 평택 주민들을 위시한 시위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하지만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염원과 투쟁,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의 항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새울의 들녘에는 철조망이 드리워졌고, 통행이 제한됐으며, 영농 작업도 금지되기에 이른다. 부연하자면, 평택 미군기지 확장 공사는 2004년 정부와 미국의 합의에 의해 결정됐다. 이후 매해 일구었던 논과 밭은 하루아침에 군사보호 시설로 지정되자, 내 논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도 2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을 물게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날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그렇다고 이 다큐멘터리가 대단하고 거창한 배경지식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 이주가 시작된 2007년 봄까지 1년 여. 할아버지와 대추리 주민들의 일상을 담담히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주민 촛불 문화제'나 그 곳을 지켜냈던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목소리만으로도 우리는 당시 주민들이 느껴야 했을 참담함을 그대로 공감하게 된다.
사실 <길>은 김준호 감독이 조연출로 참여한 <대추리 전쟁>의 후속편과 같은 영화다. 대추리를 기록한 대표 다큐멘터리로 알려진 <대추리 전쟁>은 2006년 5월 4일 '여명의 황새울' 작전의 참상을 그대로 전하고, 그 전후 주민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 작전이 끝난 직후를 출발점으로 삼은 <길>은 방효태 할아버지에게 좀 더 카메라를 할애한다. 전경들이 곳곳에 진입해 보초를 서자 할아버지는 논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기 위해 하루 종일 맨 몸으로 땅을 파고 또 판다. 앙상하지만 단단한 육체야 말로 할아버지가 평생 땅과 호흡했다는 증거일 터. 그래서 할아버지가 만드는 길은 그가 살아왔던 평생의 길이자 이제는 막혀버릴 '농꾼'으로의 생을 의미한다. 그러자 그 길의 의미는 할아버지와 다를 것 없는 범인들인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살아가는 각자의 삶으로 까지 확장된다. 길이 막혀버린 이 대추리는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는 그들을 강제 이주민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러니까 '<길>은 그 자체로 이주와 이산에 대한 대한민국의 참담한 기록이라는 거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분명 방효태 할아버지와 같은 한 개인의 역사를 동시에 껴안는 미시적인 시선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더불어 <길>은 김준호라는 '초짜' 다큐멘터리 감독의 순결함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논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소주병을 건넨다. 그리고 카메라를 든 감독은 빵 한 조각이 안주의 전부인 그 '깡소주'를 주저 없이 받아 마신다. 뒤이어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 할머니와 함께 먹음직스런 김치찌개를 나눠 먹는다. 그 사이 고정된 카메라가 잡은 세 사람의 식사 풍경이 꽤나 정겨워 보인다. 이런 장면은 또 있다. 논일을 하던 할아버지를 잡던 감독은 어느 순간 카메라를 놓은 채 일손을 거들기 까지 한다.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감은 둘째치더라도, 방효태 할아버지와 감독이 나누는 교감이 어디까지인지를 짐작케 하는 장면들이다. 그러니까 대추리의 객관적인 상황을 좀 더 다각적으로 담아낸 <대추리 전쟁>과 달리 다 방효태 할아버지 개인에 집중함으로써 대상에 좀 더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대추리' 다큐멘터리로만 본다면 분명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신인 감독 특유의 애정 어린 시선이 녹아있는 것이다.
이주하기 얼마 전 주민들은 함께 운동회를 갖는다. 마치 폐허와도 같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주민들과 할아버지가 계주를 하는 장면은 가장 역동적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릴레이 계주주자로 나서 천진난만하게, 그러나 그 어떤 젊은이보다 활력 넘치게 달리는 할아버지가 더 이상 "자식보다 소중한 논"을 일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도 그들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은 더더욱 역설적이다. 카메라는 봄날 논 한복판에서 피사리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일을 돕고 있는 감독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그 넉넉한 시간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지켜야 할 땅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만든다. 대추리의 공기와 할아버지의 회한을 영상 가득히 채워낸 <길>은 분명 다큐멘터리가 동시대에 어떤 책무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소박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떤 의미에서 엇비슷한 촌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워낭소리>에 대한 반대말에 가까워 보인다.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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