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사건을 목도 혹은 경험하고도 자신이 갖고 있는 쉐마 (Schema) 로 각기 다르게 사건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동물이 인간인지라, 같은 사건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A와는 다른 B, 혹은 C 이상으로 해석하는 특징을 가진다. 영화 연출에 있어서도 비슷한 경유가 적용될 수 있는데, 어느 역사적 사건 (예를 들면 전쟁) 을 감독이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고 연출해 내는가에 따라 그 역사적 사건이 승자의 시각에서 기술할 수도 수 있고 혹은 패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끔 연출할 수도 있다. 한 예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Iwo Jima> 는 승자인 미군의 시각이라는 기존의 전쟁영화 시각에서 벗어난 영화다. 평범한 개인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집단화에 함몰화해 이오지마에서 산화해 간 일본군 개개인의 궤적을 조망한 영화로, 제 2차 대전이라는 동일한 사건이지만 연출 시각에 따라 다르게 역사가 조망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 중 하나이다.
고로 필자는 영화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에서 두 여인의 내면을 움직인 작동기제에 관해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이 영화의 감독 사울 딥이 무엇에 역점을 두고 연출했는가를 맨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감독이 무엇에 관해 역점을 두고 연출하였는가를 먼저 살펴본 이후에 여성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동인이자 작동기제를 바라보는 게 순서이기에.
18세기 영국, 17살이라는 나이에 영국 최고의 권력가 데본셔 공작 (랄프 파인즈) 과 결혼함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향유할 수 있는 신분상승과 더불어 일약 영국 사교계의 아이콘으로 혜성 같이 떠오르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조지아나 (키이라 나이틀리). 조지아나 데본셔 공작부인의 일대기 가운데 사교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영국 상류층의 화려함 혹은 휘그당 (Whig) 의 선거 승리를 위해 조지아나가 정계에서 화려한 활동을 하는 조지아나의 역동성, 또는 이 영화의 부제 ‘세기의 스캔들’을 연상하고 조지아나 부인의 엽색 행각에 역점을 두고 연출한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 될 확률이 큰 영화다.
그렇다면 감독은 어떤 부분에 역점을 두고 영화를 만들었을까? 사교계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나타내려는 조지아나의 외양적 횡보에 중점을 두고 이 영화를 연출하기 보다는, 여성 캐릭터들의 내면과 그 내면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무엇인가에 관해 역점을 두고 세심하게 연출한 영화이다. 즉 주인공의 내면세계 묘사와 행동의 모티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략어법으로 묘사되고 외양적 화려함이 돋보이는 영화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주인공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연유는 이러한 원인 제공자 혹은 심적 변화가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라는 친절하고도 섬세한 연출을 관객들에게 제시해주는 이 영화에서 심도 있는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은 3명이 나온다. 하지만 스펜서 부인 (샬롯 램플링) 의 역할은 본 글에서 살펴보기엔 내면 묘사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인물이기에 2명의 여성, 조지아나와 베스의 내면세계와 더불어 그녀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작동기제가 되는 모티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관해 살펴보겠다. 모티브를 알게 되면 그만큼 그녀들의 행동 양태에 대한 이해가 되기도 하기에 말이다.
먼저 히로인인 조지아나부터 보자. 조지아나는 명성과 부를 한 몸에, 그것도 이른 나이에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교계와 휘그당 정계로 눈을 돌렸을까? 영화 초반부를 보면 나이 많은 데본셔 공작이 꽃다운 나이의 조지아나와 중매로 결혼을 하기 전 조지아나의 모친인 스펜서 부인에게 스펜서 가문의 여인들이 그동안 아들을 얼마나 많이 낳았는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일생의 최대 중대사인 결혼을 앞두고 장차 장모가 될 스펜서 부인에게 딸 조지아나의 성격이나 취향 등에 대해 관심 갖기 보다는 스펜서 가문의 여인들이 가문의 혈통을 잇기 위한 아들을 얼마나 출산할 수 있을런지에 관한 질문을 염두에 두었음은 이 결혼이 데본셔 가문의 혈통을 잇기 위한 생물학적 결혼이지 조지아나와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기 위한 결혼이 아님을 초반에 암시한다. 결혼식 이후 조지아나를 위한 신혼 초야의 긴장감 완화적 배려 (사랑한다는 말이나 애무) 는 전혀 없이 데본셔 공작이 첫날밤을 지내는 장면에서도 아내를 위한 배려심은 전무한 남자임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남편 방에서 여자가 알몸으로 도망치는 지경이니 신혼부터 이 결혼이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 애정 없는 결혼의 단초는 바로 남편인 데본셔 공작이 먼저 제공한다.
설상가상으로 결혼 생활 6년 동안 남아를 2번 사산하고 여아만 2명 출산하게 됨으로 남아를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데본셔 공작과 조지아나 부인의 금술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속으로는 울음을 삼켜야 하는 슬픈 광대의 운명과 매한가지로 모든 영국인이 그녀를 사랑했으나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은 남편 데본셔 공작이었다. 가문을 잇기 위한 아들이 없다는 착찹함으로 인해 자신의 친딸들보다 집에서 기르는 개를 더 아끼고 보살피는 공작. 그리고 피붙이 친아들은 아닐지라도 데본셔 공작이 베스의 아들에게 사냥용 소총을 다루는 방법을 설명할 때의 친밀함과 다정다감함을 멀리서 바라보는 조지아나의 시선을 눈여겨 보라. 친딸들에게는 데본셔가 이러한 배려를 나타내는 장면이 전혀 없었다. 도리어 베스의 아들에게 애정을 갖는 연출을 통해 데본셔 공작은 오로지 가문의 형통을 잇기 위한 상속자만을 간절하게 바라지 부인 조지아나와 세 딸들은 (조지아나가 두 명의 딸을 출산하기 이전에 데본셔가 다른 여자를 통해 낳은 딸이 한 명 있었다. 이 딸을 양육하면서 두 딸을 출산한다.) 안중에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데본셔 공작은 아마도 리처드 도킨슨의 명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200년 전에 미리 읽은 모양이다.
만일 데본셔 공작이 대를 이을 후사인 아들에 대한 집착 대신 아내 조지아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아꼈다면 조지아나의 자아 확장 영역은 사교계와 휘그당 유세인사라는 외부 영역이 아닌, 가정이라는 내부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영화 속 장면은 영화 후반부 조지아나의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지아나가 딸들의 편지를 살펴보고 모성애에 기인하여 사랑하는 딸들을 위해 남편 데본셔 공작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은 데본셔 공작으로의, 가부장적 권위로의 회귀라는 환원주의 부정적 시각으로도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녀가 파격, 일탈보다도 최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것은 사랑보다도 다름 아닌 가정, 모성애였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한 영역 혹은 특정 성장기 동안 애정이나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다른 영역 혹은 다른 연령대를 통해 결핍된 보살핌이나 애정을 충족시키려는 보상심리적 성향을 가진다. 조지아나도 이런 심리적 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교계의 여왕으로 지위를 굳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타인에게 주목 받고 싶어하는 그녀의 성향이 최우선적이라기보다는, 순탄하지 않은 가정생활에 큰 원인이 있으며 이는 데본셔 공작이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함을 영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남편에게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의 공백을 가정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 보상 받고자 하는 보상심리체계가 작동함으로 조지아나는 부와 권력을 이미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영국 상류층 사교계와 정계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두 번째로 베스 (헤일리 엣웰) 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지아나가 득남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 온천으로 유명한 지방에서 만난 베스는 처음에는 조지아나가 베스의 딱한 사정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그녀를 위로 해주고 말벗으로 위안 받고자 런던 데본셔 집안으로 초청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아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동을 하게 된다. 베스의 행동을 표면적으로만 살펴본다면 관객들에게 비난 받아 마땅하다. 조지아나에게 있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모양새가 되기에 그렇다. 하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만 살펴보고 그녀를 비난만 할 수 없는 까닭은 베스 그녀가 그러한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취한 동기가 그녀의 이기적 동기 때문이 아니라 - 영화 후반부 조지아나가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 다름아닌 모성애에 연유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볼 수 없다는 애닮은 모성애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불합리한 선택을 한 캐릭터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 어머니의 입장으로 200년 전 베스의 입장에 우리가 똑같이 위치한다면 우리 역시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할 여지가 다분히 높아지기에 베스라는 캐릭터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조지아나와 베스 두 여인의 구도는 영화 속 구성만으로 살펴본다면 대립각의 구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어야 한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공존할 수 없듯 한 가정 안에 두 여자가 공존할 수 없다는 상식 선에선 말이다. 무엇보다 베스는 한 두 해만 조지아나와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같이 지내는 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견원지간이 되어야 마땅하다. 베스의 비윤리적인 행동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불같이 화내는 조지아나의 태도는 조지아나의 입장이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었을, 당연한 처사이다. 하지만 본 영화에선 스토리 후반부로 갈수록 두 여성의 관계가 대립각의 구도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진행되어감을 살펴볼 수 있다. - 예를 들면 조지아나가 잉태된 아이를 런던에서 벗어난 시골에서 출산할 때 베스는 그녀를 홀로 남겨두지 않고 출산할 때까지 동행인으로 있어준다.
조지아나는 알고 보면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하던 여인이었으며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 결핍된 애정과 관심의 영역을 충족받기 위해 가정 밖이라는 외부, 즉 휘그당 정계와 사교계에서 그녀의 열정을 불태웠음을 조망했다. 그와 더불어 한 지붕 안에서 애증의 관계이자 불완전한 공존 관계의 두 여인 조지아나와 베스가 똑같이 공유했던 작동 기제이자 모티브는 아이러니하게도 모성애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스크린을 통해 살펴보았다. 만일 조지아나와 베스 두 여성이 현재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현대의 상황에서 어떤 자의식과 모티브를 가지고 당당하게 그녀들만의 삶을 영위해 나갔을까 하는 상상을 기자시사회 극장 문을 나서며 해보게 된다.
2008년 10월 13일 월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