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해변가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는 프랑스어 신문엔 종전을 알리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La Guerre est fine.(The War is over.)- 과묵한 사내의 눈엔 사연이 서려있고, 말 대신 내뿜어지는 담배연기는 흐릿한 잔상처럼 흩어져나간다. 1936년, 베를린의 술집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연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위조지폐 제조 실력을 지닌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뒤, 그 곳에서 어떻게 생을 연명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처럼 담고 있다. 동시에 이는 파운드화와 달러의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적국인 영국과 미국에 유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려 했던 나치의 ‘베른하트 작전’이란 실화의 재구성이기 하다. 세계 최대의 위조지폐 사건이라 꼽히기도 하는 ‘베른하트 작전’은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을 대거 인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위조지폐범으로 잡혀 유태인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로 끌려온 뒤 노역에 시달리던 살로몬은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삽과 곡괭이 대신 붓과 팔레트를 들게 된다. 그러던 중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돼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을 체포한 헤르조그 소령(데비드 스트리쏘우)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나치의 공작수행을 위한 위조전담반의 책임자로 복무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돈 안 되는 예술보단 돈 되는 불법행위에 골몰했던 살로몬에게 재능은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용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던 살로몬은 수용소에서도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그림 실력을 드러냈고, 자신의 장기인 위조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삶을 연명하는 유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출신이자 인쇄 기술자인 그의 동료인 브루거(오거스트 디엘)는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불복함으로써 그들에게 저항하려 한다. 결국 그 사이에 놓인 살로몬은 갈등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머무는 위조전담반의 수용공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수용소에서 유일한 안식처다. 하지만 그곳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배(圍排)됐을 뿐,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질 때, 그들에게 삶의 여지는 없다. 위협에 굴복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찰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저항이 종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브루거의 주장은 옳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택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부른다. 죽음과 직면한 이들은 오히려 죽음에 맞서는 것이 만만찮다. 생존과 가장 동떨어져 죽음과 대치한 순간, 생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살고 죽음의 문제가 더욱 가깝다. 나치의 체제하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유태인들에게 그 당시 삶이란 매일같이 아득해지는 것이었을까. ‘오늘 총살되느니 차라리 내일 가스실에 가겠어’라는 살로몬의 말처럼 그들에게 삶이란 단 하루의 연장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적 연장을 통해서 삶에 대한 의지도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운터페이터>는 최소한의 단위개념으로 몰락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의 의지를 되새기는지, 그리고 그 국지화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삶의 의미가 유린당하는 순간 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건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욕구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가스에 대한 공포에 예민해지고, 결핵을 앓는 동료를 위해 가까스로 약을 마련한 찰나 총에 맞아 죽는 동료를 목격하는 그들의 삶에 인간의 고결한 가치관 따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과 나치 유태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운터페이터>는 강압적 체제 안에서 연명하는 인간의 삶을 들춘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하지만 전자가 짓눌린 삶을 온전히 펼쳐 원형의 가치를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짓눌린 채 납작해진 삶의 처참한 몰골 안에 잔존한 일말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그 차이는 선택의 불가피성을 통해 발생한다. <타인의 삶>이 체제를 구성하는 가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의미를 채취한다면, <카운터페이터>는 체제에 수용 당한 피해자의 행위 그 자체가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공간에 은닉하는 지배자 계층인 반면, 후자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감시 당하는 피지배자 계층인 까닭이기도 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수용소의 벽이 무너지고 같은 유태인의 총부리에 위협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유태인 수용자임을 밝히기 위해서 또 한번 사력을 다한 뒤에야 온전히 살게 됐음을 체감한다.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 벽 너머 수용소의 모습은 그들의 삶이 어떤 공포로부터 협박당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벽 너머에서 문득 들려오는 총성과 절규로 굳어진 그들의 표정은 평화롭게 위장된 일상 속에 잠재된 공포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생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간절하게 끌어당긴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고 그 가치가 희미해지는 찰나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는 더욱 짙게 드리운다. <카운터페이터>는 죽음에 직면했던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비출 뿐, 그에 대한 가치를 되묻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도, 기쁨조차도, 그 너머에선 부재한다. 그저 삶이 지속될 뿐이다. 추억으로 남지 못할 상흔 같은 기억을 떠안은 채 지속될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위안을 통해 다시 오늘을 버티며 생존해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생의 의미는 그렇게 살아남아야만 되물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2008년 7월 7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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