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도 이런 보릿고개가 없었다. 2000년대 이후 활황만이 계속 되왔던 터라 여기저기 앓는 소리다. 총선에서 여대야소 정국을 줘버린 야당 얘기가 아니다. 유례없는 불황을 맞이한 한국 영화얘기다.
지난 4일 CJ CGV가 발표한 '2008년 3월 영화산업 분석자료'에 따르면 3월 한국 영화 점유율은 전월과 비교해도, 지난해에 비교해 봐도 ‘완전’ 감소했다. 단적으로 봐도 개봉하는 한국 영화가 없다. 4월에도 <GP 506>을 제외하곤 상업영화라 부를만한 작품은 하정우, 윤계상 주연의 <비스티 보이즈>가 고작이다. 할리우드 대작들이 몰려올 5월은 더 심각하다.
그래서일까. 충무로 인력들이 TV로, TV로 발길을 향하고 있다. 송윤아, 김하늘, 이범수가 출연한 <온 에어> 등 몇 년 전만해도 드라마에서 볼 수 없던 배우들이 속속 드라마로 복귀하고 있다. <숙명>으로 쓴잔을 마신 송승헌과 예비역으로 1년 만에 복귀를 예고한 소지섭이 100억이 훌쩍 넘는 제작비를 예고한 <에덴의 동쪽>, <카인과 아벨>을 택한 이유도 ‘한류’를 등에 업고 좀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충무로의 감독, 스탭들의 진출이 용이한 것은 케이블이다. OCN을 비롯해 각종 케이블 채널들이 앞 다퉈 자체 제작 TV 영화를 만들며 이름 꽤나 알려진 영화 인력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춘궁기를 돌파하는 궁여지책일 뿐인가, 다양한 상업영화의 창구 역할을 해 낼 것인가.
섹시 코드 앞세운 코미디 전문 감독들의 영화 배틀
지난 8일 서울 안국동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조금은 특별한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두 명의 감독, 9명의 배우가 4편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선 것. 영화 제작사 더드림픽쳐스가 제작하고, 온미디어 계열 영화채널 OCN을 통해 개봉 이후 방영될 <장감독VS김감독> 프로젝트가 그 주인공이다.
“상업영화가 저예산으로 기획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편한 방식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제작비나 투자사의 기호에 맞추기 않고 할 수 있는 나름 실험적인 기회라 이 프로젝트를 수락했다.” <라이터를 켜라>, <불어라 봄바람>을 연출하고 <박봉곤 가출사건>, <귀신이 산다>의 시나리오를 썼던 장항준 감독의 말이다.
<장감독VS김감독>은 홍보 방식부터 차별화를 꾀했다. 장항준 감독과 ‘배틀’을 붙은 김정우 감독은 강제규 사단에서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했고, <구세주>, <최강 로맨스>로 안타를 친 바 있다.
‘배틀’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장 감독의 <전투의 매너>와 김 감독의 <색다른 동거>가 17일부터 전국 롯데시네마 20여 관에서 개봉 한 뒤 최종 관객수로 승자를 가리는 것. 뒤이어 25일 밤 11시 OCN에서 두 감독의 <음란한 사회>와 <성 발렌타인>을 연속 방영한 후 승패를 결정한다. 만약 1대 1의 결과가 나온다면 1, 2라운드의 승자의 작품을 다시금 방영해 최종 승자를 가릴 예정이다. 충무로 감독들의 대결 구도를 내세운 독특한 차별화 전략인 셈이다.
배우들도 남부럽지 않다. 판이하게 다른 두 남녀의 동거일기를 다룬 <전투의 매너>는 브라운관에서 더 친숙한 서유정과 강경준이, 고지식한 학원강사의 성인용품 판매기인 <음란한 사회>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이정헌, 코미디언 출신 연기자 김진수가 주연을 맡았다.
김정우 감독의 배우들은 좀 더 풋풋하다. 띠 동갑 제자에게 반한 노처녀 여교수의 해프닝을 그린 <성 발렌타인>은 <미인>, <스승의 은혜>의 이지현과 <궁> <다세포 소녀>의 신예 이용주가, 처녀귀신과의 로맨스에 빠지고 킹카로 거듭나는 남자를 내세운 <색다른 동거>는 <태왕사신기>의 김혁과 <두근두근 체인지>의 정시아가 타이틀롤을 연기했다.
섹시코드와 차별화 전략 사이
|
“충무로에서 5년만 더 해먹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춘을 불살라 열심히 하겠다.” 어느 신인 감독의 포부가 아니다. 충무로에서 시나리오와 메가폰을 잡으며 잔뼈가 굵은 장항준 감독의 출사표다.
2006년 데뷔작을 찍은 뒤 코미디 전문 감독으로 안착한 김정우 감독도 다르지 않다. “케이블 영화지만 충무로 영화 못지않게 할 수 있는 걸 다했다”며 케이블용 TV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일축한다. 상엽영화 열편을 만들 만한 조촐한 예산과 10회를 조금 넘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냈지만 퀄리티 만큼은 주목해도 좋다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김정우 감독은 “코미디라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방영 시간을 의식한 탓인지 섹시 코드는 필수다. “브라운관으로 넘어오니 섹시 코드가 필요했다”는 말이 과히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후 11시 이후 주 소비층인 남성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 당기기 위해서 다소간의 노출과 선정적인 소재는 필요악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장감독 VS 김감독>의 네 편 모두, 혼전동거와 섹스용품, 처녀귀신과의 로맨스와 띠동갑 연상연하 커플 등 겉으로 보기에 과장되고 자극적인 소재들로 채워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소재주의로 전락하지 않고, 장르 안에 ‘사람’ 얘기를 담는 것이야 말로 감독들의 내공 싸움일터. 채널 CGV의 <소녀 X 소녀>, OCN의 <동상이몽>과 <코마> 등 기존 TV 영화들 중 장르성과 재기발랄함을 무기로 삼았던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얻었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감독 VS 김감독> 프로젝트 또한 가벼움으로 승부해서는 ‘섹시코드’로 승부하는 그저 그런 작품으로 인식될 공산이 크다.
충무로 감독들의 TV 진출, 계속될까?
사실 TV 영화들이 활황기인 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케이블 채널의 다변화와 시청률의 지속적인 상승이후 자체 제작 드라마와 TV 영화들이 속속 프라임 시간대 브라운관을 채우고 있다.
봉만대 감독의 에로 영화 <동상이몽>이 그 출발이었고, <알포인트>의 공수창 감독은 <코마> 5부작을 진두지휘 하며 호러로 그 장르의 외연을 넓혔으며, <소녀 X 소녀>처럼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과의 산학협동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성 있는 신인들에게 장편 영화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
|
연극과 영화, 연출과 각본을 넘나드는 장진 감독. 한 영화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관객에 대한 두려움과 레퍼토리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충분히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어렵다고 알려진 연극계에 대한 목소리였지만 이건 케이블 영화에 진출하는 감독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얘기다.
아무래도 시청률을 의식하다 선정주의와 소재주의, 그리고 일정한 노출에 매몰되어 온 작품들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 케이블이 낳은 스타로 불리는 서영을 내세운 <섹시몽>은 <몽정기> <자카르타>의 정초신 감독을 홍보용으로 내세웠지만 헐거운 만듦새로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더불어 충무로의 보릿고개를 핑계 삼아 이름을 알린 감독들이 투자가 용이하고 일단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케이블로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무시할 수 없다. 신세대 전설의 고향을 표방한 <기담전설>도 <천군>의 민준기, <우렁각시>,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의 남기남 감독이 참여한 공포 ‘드라마’다.
OCN의 공전의 히트작 <이브의 유혹> 4부작이 <두 얼굴의 여친> <마음이> 등을 만들었던 화인웍스라는 제작자와 충무로 스탭들의 노하우가 결합된 산물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케이블용 영화라 할지라도 영화가 영화다워야 한다는 사실, 눈높이가 높아진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정답은 사실상 단순한 셈이다.
아직은 예산과의 싸움, 그러나 할리우드의 예에서 배워라
<클로버필드>는 사실 감독 매트 리브즈 보다 제작자의 이름이 더 유명한 케이스다. J.J 에이브람스, <미션 임파서블3>를 연출하면서 성공적인 스크린 입성기를 보여줬지만 사실 <로스트>의 제작자로 더 유명하다. <히트>와 <마이애미 바이스>의 마이클 만 또한 TV 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로 잔뼈가 굵은 드라마 연출자 출신이다.
시즌제와 에피소드별 연출이 용이한 미국드라마는 에피소드별로 유명 감독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미국 독립영화계를 이끌어 온 데이비드 린치의 유명한 TV 시리즈 <트윈 픽스>도 한 회 한 회 연출자들이 다른 경우다. 또한 미국 영화 채널 ‘HBO’에서 작품성있는 자체 제작 영화들이 속속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상 산업이 국가 산업인 미국에서는 일반화된 케이블용 드라마나 TV 영화 연출에 색안경일 끼고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지금 과도기다. <별순검>, <과학수사 KPSI>등 뚝심있는 드라마들도 출현하고 있지만 아직 가뭄에 콩나듯 한 실정이다. 더더욱 드라마가 아닌 TV 영화의 경우는 감독들이 참여한다고는 하지만 특정 장르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시나 위기가 기회일 수 있다. 천만 관객 시대, TV 영화들은 돌파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에 저예산 영화들이 도모될 수 있는 여러 갈래 하나가 될 수 있다. 특히 한국 영화들은 좀 더 정교한 상업영화들이 필요할 때다. TV 영화들은 그러한 장르성의 정교함이 시험될 수 있는 좋은 무대다.
그러니까 이번에 대결을 펼친다는 장감독과 김감독의 진정한 대결 상대는 서로가 아니다. 얼마나 완성도 있는 작품을 내놓느냐가 관건이 될 관객, 시청자와의 승부다. 보릿고개에 기회는 여러 번 주어지지 않는다.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