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열흘이다. 살아오면서 대단히 희망찬 적도 없었지만, 올해만큼 암울한 기분으로 해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기도 처음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12월의 마지막 날을 <아메리칸 갱스터>와 함께한 탓도 좀 있는 듯하다. 영화가 그렇게 엉망이었냐고? 그럴 리가!
영화는 훌륭했다. <대부>처럼 시작해서 <언터처블>로 갔다가 ‘이대로 끝나면 좀 아쉽지’ 싶을 무렵, <좋은 친구들>의 엔딩과 같은 싸한 장면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러셀 크로우와 덴젤 워싱턴의 연기 앙상블은 명불허전이었고, 중심이 단단히 잡힌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 또한 일품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리들리 스코트는 단단히 벼르기라도 했는지, 2시간 40분간 관객의 눈을 꼼짝도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문제는 영화가 아니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영화를 보는 자의 눈에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메리칸 갱스터>를 보는 내내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그 남자, 흉폭하다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 분). 그는 참 점잖은 인물이다. 스승처럼 모셨던 범피 존슨의 사망 이후 할렘의 중심인물이 된다. 성실히 일하고 검약하며 살아가는 그는 언제나 가족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생활한다. 어머니를 위해 매주 일요일 예배시간을 거르지 않을 만큼 효자이면서 동시에 청교도적이다.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근거지인 할렘 주민과의 ‘나눔’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점잖고 성실하다 한들, 그는 어디까지나 마약밀매상일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정작 할렘의 ‘동족들’이 마약에 찌들어 길바닥에 나뒹굴어도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자신을 위협하고 ‘시장질서’를 어지럽히자 대로변에 서서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는가 하면, 당당히 뇌물을 요구하며 그의 사업을 위협하는 경찰에겐 테러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프랭크 루카스는 갱스터다. 단지 그간 우리가 봐왔던 그들과 피부색만 다를 뿐, 그는 흉폭하다.
그 남자, 처절하다
여기 한 남자가 또 있다. 리치 로버츠.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경찰이다. 눈 먼 돈 100만 달러를 보고도 상부에 고스란히 보고할 정도로 ‘깨끗한’ 그는, 사회악의 청소를 위해 늘 동분서주한다. 한 번 붙잡은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법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삶은 처절하다. 경찰들의 뇌물이 일반화돼 있던 1960년대 말의 미국사회, 청렴과 강직 말고는 아는 것 없는 그는 경찰사회에서 ‘왕따’가 된지 오래다. 하나뿐이던 친구는 마약에 빠지더니 결국 죽고 말았고, 당최 끊을 수 없는 바람기는 벌써 오래전에 그의 가정을 파탄냈다. 심지어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재판까지 해야만 할 정도로 전부인과의 감정의 골은 깊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일뿐이다. 워커홀릭으로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환경. 그러나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패경찰과 똑같다는 아니 그보다 못하다는 비난뿐이다. “차라리 뇌물을 받아 가족을 챙기는 것이 훨씬 낫다”는 전부인의 말에 상처받은 얼굴이 돼 버리는 리치 로버츠. 그의 삶은 처절하다.
진짜 흉폭한 것은 누구?
그러나 그들을 그런 삶 속으로 몰아간 것은 사실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별다른 죄도 짓지 않은 사촌이 경찰의 총에 맞고 길 위에 죽어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란 프랭크 루카스에게 어차피 삶의 길은 다양하지 않았다. 똑같이 길 위에서 죽거나, 혹은 악착같이 살아남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생존의지가 강했던 그가 마약을 ‘하는’ 대신 ‘파는’ 길을 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할렘에 마약이 넘쳐나건 말건, 흑인사회가 어떻게 되건 말건 그 시대 미국사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백인 주류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흑인은 그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회의 하층민일 뿐이다. 참전용사의 관 뚜껑을 열어서라도 범죄의 단서를 잡으려는 리치 로버츠를 저지하던 연방수사관이 “이탈리아 마피아도 못한 일을 흑인이 했다고?”라고 반문하며 조소를 날린 것 또한 그런 인식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흑인들이 모여 사는 할렘이 어떤 모양새를 이루건 애초에 그것은 백인자본가들과 관료사회의 관심사가 될 일이 아니었다. 프랭크 루카스가 마약을 통해 이뤄낸 부와 권력은 그래서 백인들과 똑같은 착취의 모양새를 취해 얻은 것이었음에도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폭한 세계, 처절해야 하는 삶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것은 리치 로버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뇌물을 받고 모두가 부패한 상황에서 독야청청 혼자만 깨끗하다는 것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일, 그가 외로운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경찰이 경찰을 협박하고 범죄자가 경찰의 스폰서가 되어주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라면 ‘강직’이나 ‘청렴’이 설 땅은 좁기만 하다. 직업적 성공을 위해서는 언제고 워커홀릭이 될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고, 함께 엇나가지 않으면 동료로 인정받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회를 견디는 것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잘 했다고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근원적 외로움을 가족 안에서 풀어내지 못한 마초 리치 로버츠가 평탄한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도리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게다. 비록 영화 속의 강직한 형사는 오로지 신념으로 살아남았지만, 현실 속의 타인들에게 “이성으로 극복하라”는 주문은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 아니던가.
영화에 비친 오늘의 얼굴
흉폭하거나 처절하거나, 어느 길을 택해도 행복해질 수 없는 영화 속 두 남자의 얼굴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얼굴이 비친다. 1968년의 미국이나, 2008년의 한국이나 다를 것은 없다. 하층민은 언제나 소외당하고, 가진 자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그나마 서구사회가 약간의 진화를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사회 덕목화하고 복지 자본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실험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개발과 발전에 목을 맨 채 갖지 않은 80%의 구성원을 나락으로 던져 넣고 있다. 심지어 ‘경제만 살린다면’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스스로 나락으로 떠밀려 떨어지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사회의 철저한 방기 속에 마약을 팔고 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망가져간 40년 전 흑인사회의 모습과 우리의 현실은 무엇이 다른가?
타인을 밟고 죽여야 살아남는 사회, 생존을 위해 양심 따위 돌아볼 새 없는 사회, 직업적 성취를 위해선 가정 따위 돌볼 새 없는 사회,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부정부패를 부추겨도 용서받는 사회, 사적 환경이 어떻든 간에 사회적 평판만 좋으면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모두가 같은 얼굴이기를 원하는 오늘의 한국, ‘시장 만만세’의 자본주의가 지닌 본질이다. 진정 흉폭하지 않은가?
희망은 있는가?
프랭크의 부와 권력이 마약밀매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가족은 없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어머니는 아들을 탓한다. 자신이 누린 집과 평화가 무엇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몰랐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아들을 책망한다. 프랭크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 안락하고 화려한 생활을 만든 것은 모두 프랭크와 그 형제들이 팔아치운 마약에서 비롯된 것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 프랭크를 향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원망이 스친다. 타인의 목숨과 삶을 대가로 얻어낸 부와 권력을 누릴 만큼 누려놓고 막판에 와서는 원망이라니.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었을까?
누군가가 기운차게 열어젖힌 대운하시대, 달력 넘어가는 것을 보며 흘러나오는 뉴스를 들으며 한숨을 짓는 것은, 프랭크의 형제와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이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시작을 말리지 못하고 망가져가는 것을 볼 만큼 본 뒤에, 그들을 탓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이미 수레바퀴는 바꿔 끼워졌다. 지금의 바퀴를 선택한 우리는, 마지막 순간 과연 공범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성찰은 결국 각자의 몫이겠지만, ‘경제만 살린다면’이라며 모든 걸 내팽개친 채 수레의 폭주를 방관하고 있는 ‘우리’에게 성찰의 여유가 남아 있기는 한지 의문이다.
글_이지선 영화컬럼니스트(crazysun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