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슬이란 배우의 이미지, 엄밀히 말하자면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이 드리운 영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한 신미수는 동시에 <용의주도 미스신>을 대표하는 키워드다. 그녀는 사랑을 경시하는 사회적 풍토를 상징하는 트렌드 세터이며 동시에 그 세태에 역설의 메시지를 전도하는 역할 수행의 목적성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 과도한 무게감을 덜고 간단히 말하자면 <용의주도 미스신>은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 된장녀 수기쯤으로 말해도 될 것이다.
사실 <용의주도 미스신>은 캐릭터를 통해 미끼를 던지는 작품이며 그 캐릭터의 동력으로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진행되는 드라마를 끌고 가는 작품이다. 그 축을 맡은 캐릭터는 한예슬이 연기하는 신미수, 즉 용의주도하다는 미스 신이다. 그녀는 각기 다른 남자에게 용의주도한 연기력으로 낚시대를 드리우는 선수 중의 선수다. 청순가련과 매혹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장기를 토대로 부자부터 영계까지 구워삶는 그녀의 목적은 자신을 만족시켜줄 남성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재력이거나 권력이며, 혹은 탄탄한 근력일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용의주도 미스신>이 내세우는 간판 같은 캐릭터, 신미수는 특별한 에피소드를 양산하는 작품 내의 이슈메이커이자 작품의 매력 자체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이는 신미수를 연기하는 한예슬이란 배우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캐릭터적 매력의 연장선상이란 자체만으로도 묘한 생동감을 발산한다. 특히나 <환상의 커플> 나상실과 이미지로서 교집합을 형성하는 신미수는 다소 진부한 평면적인 이야기 구색에 입체감을 형성한다. 나상실과 마찬가지로 양면의 질감을 갖춘 신미수는 그 연장선상에 놓인 캐릭터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개별적인 뒷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확보한다. 기억의 상실과 복원의 사이에서 겪게 되는 나상실의 딜레마처럼 신미수는 자신의 덧없는 현실적 욕망과 자신의 과거에 얽힌 트라우마를 지닌 독자적인 트라우마를 완성하고 이를 통해 유사한 질감의 캐릭터에 다른 보호색을 입힌다.
물론 다소 과도한 설정의 이야기적 양식이 거슬리기도 하고 이야기의 흐름 자체만을 살핀다면 상투성이 두드러지거나 진부함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설정의 가벼움에서 기인한 캐릭터적 의문도 존재한다. 능력 있는 신미수가 남자들을 홀리는 건 그녀가 자신의 매력을 통해 남자를 거느리는 것, 즉 골라먹는 재미를 즐긴다는 것일 텐데, 여기서 골라먹는다는 의미는 결국 결혼을 대비한 어떤 고민과도 연관이 된다는 점에서 어떤 오류가 감지된다. 결국 그녀가 재력과 권력에 탐닉하는 건 결국 자신에게 능력을 덧씌워줄 방어 기재처럼 남자를 활용하겠다는 것인데 능력 있는 그녀가 어째서 자신의 삶을 어지럽힐 정도로 그런 욕망에 깊게 빠져드는가에 대한 적절한 논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일찍 아버지를 잃게 된 것에 대한 트라우마일 것이라고, 혹은 그녀가 종종 말하곤 하는 옛사랑에 대한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작품의 단서를 통해 짐작을 거듭하게 되지만 분명 탐탁하지 않은 구석이다.
하지만 캐릭터 자체를 동력원 삼아 밀고 나가는 영화적인 양식은 진부함을 잊게 만드는 절대적 매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신미수의 주변부에 놓인 남성 캐릭터들이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캐릭터를 형성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단순한 이야기의 가벼움을 상쇄하는 캐릭터의 저력은 <용의주도 미스신>의 핵심 매력이자 주무기다. 특히나 여성 캐릭터를 원톱으로 밀고 나가는 사례가 드문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용의주도 미스신>은 특별한 가능성이자 독보적인 양식으로 여길만한 특수 사례처럼 보인다. 특히나 사랑을 경시하는 세태를 역설적으로 풍자하는 캐릭터는 영민하지 않아도 무겁지 않게 드라마틱한 정서를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트렌디 드라마로서의 장점도 평가할만하다. 또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구축된 영화적 호감이 압도적이라는 점도 <용의주도 미스신>이 어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기가 될 것 같다. 특히나 화장실 유머 일색인 최근의 코메디 경향 가운데 과감하지만 천박하지 않게 망가지는 캐릭터로 웃음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더욱 반갑다.
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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