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앙 로즈 La vie an rose>는 에디트 삐아프의 생을 기억하는 어떤 방법이다. 이는 전기적 서사일 수도 있고, 어떤 단면적 감상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객관과 주관의 적절한 안배일 것이다. <라비앙 로즈>는 완벽하게 객관화된 인물의 재현이라고 말할 순 없을지라도 미화를 통한 인물의 허구적 재생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다사다난했던 유년시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생의 서사는 비극적인 그녀의 삶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본다.
하지만 <라비앙 로즈>는 에디트 삐아프라는 인물의 전기적 서사를 소재로 취득하고 있지만 그 인물의 삶이 그 자체만으로 큰 감명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어떤 핸디캡을 지니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에디트 삐아프의 삶을 통해 거머쥘 수 있는 건 지독한 고난과 불운의 연속일 뿐이다. 지독한 가난과 무책임한 부모의 양육 아래서 성장한 유년 시절부터 지독한 병마에 찌들어 초라하게 오그라든 육신으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삶은 환희의 기쁨보다 상흔의 고통을 먼저 부여한다. 동시에 이는 인생 자체로서 쉽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생의 무기력함을 보는 것마냥 의아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앙 로즈>가 피우는 생의 갈망, 즉 에디트 삐아프가 그 지독하게 불운했던 삶 속에서 꽃피운 가수로서의 찬란한 이력은 분명 인간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을 선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소 어리석은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노래를 향한 어떤 열정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그녀의 정열적인 음성으로 전해진다. <라비앙 로즈>의 귀감은 바로 이름을 남긴 인간의 특별함에서 비롯된다. 삶이 비록 괴로웠을지언정 노래하는 생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서 자신의 삶을 각인시킨 에디트 삐아프의 생을 재현한 <라비앙 로즈>는 그 넝쿨 같은 삶 속에서 만개한 장미꽃 같은 인생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에디트 삐아프의 사소한 몸짓과 얼굴의 잔주름까지 재현한 마리온 코티아르의 걸출한 연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에디트 삐아프의 사소한 동작까지도 몸에 새겨 넣은 것처럼 에디트 삐아프의 분신과도 같은 정열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는 단순히 에디트 삐아프의 육체적 재현 이상으로 영혼에 스며드는 정열적인 감동을 만끽하게 한다. 특히나 그녀의 주옥 같은 명곡들이 재생되는 순간 순간은 음악영화로서의 즐거움도 더해진다. 특히나 극 말미, 그녀의 마지막 무대에서 불려지는 ‘후회하지 않아 Non, je ne regretted rien’는 깊은 울림을 동반한다.
다만 그 인생이 지향하는 스포트라이트를 이해할 수 없는 관객에게 그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건 일종의 지루한 고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샹송의 묘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이라면 <라비앙 로즈>는 힘겨운 시간과의 사투를 벌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극 중 어떤 질문에 대한 에디트 삐아프가 남긴 대답, ‘왜 당신은 그토록 목숨을 걸고 노래를 하죠?’ ‘그래야만 무대에 설 자격이 있기 때문이죠.’ 이는 <라비앙 로즈>가 지향하는 어떤 깊은 감동의 근원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가를 대변한다.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삶의 불운 속에서도 노래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열정적인 항해를 멈추지 않았던 에디트 삐아프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숙연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활짝 핀 장미처럼 한 시절이나마 아름답게 빛났던 어떤 이의 삶은 누군가에게 깊은 감명을 남긴다. 물론 그 이전에 그녀의 인생이 깃든 아름다운 명곡들이 그녀의 삶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라비앙 로즈>는 그 아름다운 인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유산일 것이다.
2007년 11월 20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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