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물음표 하나, 인간의 존엄성 수호는 과연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만으로 행해져야 마땅한 것인가? 물음표 둘,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에 합당한 것인가?
<브레이브 원>은 이에 대한 누군가의 대답이다. 라디오 쇼 ‘스트리트 워크’의 진행자로서 뉴욕의 자취를 소리로 수집하며 그를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도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에리카 베인(조디 포스터)은 그 도시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처참한 폭력에 희생당한다. 도시의 폭력은 그녀가 지녔던 애정을 공포로 탈바꿈시키며 사랑하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결국 상실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힌 그녀의 강박은 극단적인 선택을 부르게 된다.
<브레이브 원>은 강자에서 약자에게로 폭력이 전이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폭력의 전이가 가능한 건 폭력성을 발생시키는 도구, 즉 총의 구매가 가능한 덕분이다. 그래서 이는 총기 사용이 합법화된 미국적 사연처럼 도외시할 수도 있지만 포괄적으론 폭력성의 보편화에 총기가 상징적으로 배치됐을 뿐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란 말처럼 그녀는 방아쇠를 당겨 위협에 반응한다. 결국 폭력은 응징적 복수와 법적 처벌의 간극을 파고들며 감정과 이성의 대립적 경계선을 넘나든다.
한번 출렁인 수면이 고요함을 찾기란 어렵듯이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느끼던 에리카의 애정이 두려움으로 변질되는 상황은 쉽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적인 강박을 창조한다. 폭력에 의해 부서진 인간적 평온함은 폭력으로 인해 치유된다. 하지만 출렁인 수면에서 물이 넘쳐나간 후 다시 고요해진 수위가 예전과 같을 수 없듯이 폭력성을 체감한 이후의 평화 또한 예전의 것이 아니다. 이는 도시의 폭력성에 노출된 현대인들의 불안 심리를 극단적으로 표출하며 동시에 포스트 9.11이후 미국의 폭력적인 해결 방식에서 비롯된 부작용들에 대한 사유를 던진다.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얻어맞은 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버릇이 생기듯 가해자의 폭력은 피해자에게 폭력의 기억을 각인시킨다.
스릴러의 여왕이란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조디 포스터는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얼굴에서 발견되는 주름으로 흘러간 세월을 증명하지만 관록이 짙게 내려앉은 연기로도 연기자로서의 세월을 증명한다. 또한 비틀린 각도를 통해 공간적인 긴장감을 끌어내고, 지면을 내려다보거나 멀리서부터 인물을 쫓는 카메라는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의 시선을 연출하며 긴장감을 선사한다. 장르적인 긴장감과 인물의 내면적 갈등이 맞물리며 상충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브레이브 원>은 수작이라 말할 수 없어도 크게 흠잡을 것 없는 스릴러이며 작품에 내재된 사유는 관심을 끌만한 것이다.
앞선 두 번의 물음표에 대한 답변은 결말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의 근원을 처단하는 방식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지만 그 방식을 구현한 인간의 존엄성은 다시 한번 붕괴된다는 것. 결국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보단 자신을 지키는 것이 더욱 현명한 길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삶이 목표를 완수해도 그 뒤에 남는 건 파괴된 자신의 내면뿐인 것을. ‘죽을 방법은 많아. 살 길을 찾아야지. 그게 더 힘들지만.’ <브레이브 원>의 메세지는 바로 그 대사 안에 있다. 다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에리카의 마지막 독백은 황폐한 이라크의 현실처럼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일 따름이다.
2007년 9월 29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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