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연락조차 소원했던 친구들은 절친했던 친구 하나가 죽어서야 한자리에 모인다. 알고 보니 그들은 대학 시절, 활활 타오르던 열정으로 기타를 잡고, 베이스를 퉁기며, 스틱을 휘날리던 락 그룹, '활화산'의 멤버들이다. 비록 대학가요제 3년 연속 예선 탈락의 역군들이지만, 어제의 영웅들이 만나니 뭔가 떠들썩 할만도 하다. 다만 장례식장은 우울하고 그들의 인생이 더욱 암울하여 한숨만 나오고 한없이 허탈해진다.
<즐거운 인생>은 잊거나 잃어버린 낭만을 탈환하고자 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잊거나 잃었던 대상은 이 시대의 중년이요, 아버지이며, 그들이 잊거나 잃었던 낭만은 락밴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낭만을 잊거나 잃어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낭만을 추구하기엔 책임져야 할 것이 많은 덕분이다. <즐거운 인생>은 그 책임져야 할 것 많은 고단한 인생을 철없이 부추긴다. 기영(정진영)은 망가진 인생에서 허우적거리다 ‘남의 기타’를 잡는다. 그것이 제 것 같은데 남의 것이라니 어딘가 억울하여 이 철없는 남자를 한없이 부추긴다. ‘밴드 하자’는 한마디는 너무나도 직설적이라서 기가 막히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워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 성욱(김윤석)도 혁수(김상호)도 철없는 한마디에 넘어간다.
현실을 가장한 남탕 판타지는 어떤 물음표에 대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건 ‘왜 (살아야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에 가깝다. 돈에 치이고 책임에 시달리는 남자들의 고단한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해 사육되는 삶에 가깝다. <즐거운 인생>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삶의 본능을 일깨운다. 그 본능은 ‘뭔가 내 몸 속에서 부글대는 것이 있었던’ 시절의 낭만이다. 그래서 <즐거운 인생>은 반갑지만 한편으론 낯설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전작들에서 남성들의 놀이판을 한차례씩 벌렸던 이준익 감독의 사적 욕망에 가깝기도 한 탓이다. 전쟁터에서(<황산벌>), 궁궐 안에서(<왕의 남자>), 혹은 3류 스타의 지방 무대에서(<라디오 스타)> 판은 벌린 그는 판 위의 남성들을 소진시키거나, 현실을 체감하게 했다. 하지만 끝을 향해 내달리거나, 돌이킬 수 없는 영광임을 알면서도 남자들은 그 무대를 채운다. 그래서 그 끝은 처연하다. 그래도 놀이판은 만들어져야 한다. 그 이유는 <즐거운 인생>이란 제목을 그 자체를 위해서다.
사실 <즐거운 인생>은 이준익 감독의 전례들에 비해 가장 무성의한 놀이판이다. 인물들의 일상은 종종 일방적인 동정심을 유발시킬 정도로 도식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장기는 여실하다. 놀 줄 아는 배우들은 멍석만 깔린 영화에서 알아서들 잘 놀기도 하며 비중과 관계없이 개별적인 인상을 남긴다. 흔히 말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속성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배우의 매력을 캐릭터에 접합시키는데 능숙한 감독의 역량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왕의 남자>를 통해 이준기라는 배우를 끌어낸 것처럼 장근석을 얼굴 마담격 이상의 배우적 캐릭터로 승화시킨 것도 성공적이다.
인생이 묻어있는 담담한 대사와 캐릭터들의 진솔함이 단연 매력적이지만 현실을 간과한 것마냥 무의식적으로 낭만에 도취되는 영화적 몰입은 어딘가 석연찮은 것도 사실이다. 그건 낭만으로 간과되기엔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지리멸렬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즐거운 인생>은 그 지리멸렬한 이유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나 <즐거운 인생>의 마지막 무대는 그 충동감을 열광의 에너지로 응집한다. 그 무대는 무모하여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다. <즐거운 인생>은 그렇게 현실을 간과하는 대신, 현실을 애써 무시한 채 낭만에 올인한다. 그 무대는 객기어린 오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인생>은 <라디오 스타>보다 노골적인 무대를 세운다. 그 무대는 중년 남성을 위한 응원가이자 루저들을 위한 송가를 부른다. 엄지 손가락을 들기는 망설여져도 그 무대에 뛰어들고 싶어지는 건 아마도 그런 정서적 동의 때문일 것이다.
2007년 8월 25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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