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접한 거리의 백병전을 뜻하는 ‘pitched battle’은 뜨거운 논쟁을 뜻하기도 한다. <300>은 ‘pitched battle’ 그 자체다. 스크린 안으론 ‘백병전’의 극치를 뿜어내고, 동시에 스크린 밖으론 관객의 ‘논쟁’을 끊임없이 끌어낸다.
사실 <300>은 ‘스파르타’란 단어에 대한 세간의 무지함에도 별 탈 없이 인용되던 ‘스파르타’란 단어의 본의를 스파르타식 쾌감으로 변형해 자연스럽게 이해시켜버렸다. 미국에서도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고 국내에서도 현재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300>은 고대 서양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를 21세기의 관심사로 부활시켰다. 그와 동시에 <300>은 스파르타식 관객동원력만큼이나 스파르타식 논란을 부르고 있다. 논란의 근원은 동양 문화에 대한 몰염치인가 영화라는 창작적 허구에 대한 몰이해인가의 대립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300>에서 비롯된 논쟁의 소비성이 두드러진 건 이란에서 국가와 민족의 명분을 걸고 <300>을 비난한 덕분이기도 하다. 매체와 전문평자의 비평과 칼럼, 그리고 일반 관객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형성되던 논란의 게릴라전은 국가적 분쟁으로 거듭난 일격으로 갑론을박의 진영을 구축하고 전면전으로 확산되어 논박의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일단 답이 없는 논쟁을 건드리기 위해선 <300>의 모체인 페르시아 전쟁을 밟고 건너야 한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 경 오리엔트 지방을 통일하고 이집트, 인도북부, 코카서스 산맥, 소아시아 등지로 그 세력권을 넓힌 고대 국가로 오늘날로 치면 서부 이란에서 현재의 아르메니아, 터키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대제국이자 발달된 문명 국가였다. 페르시아의 그리스계 영토인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일부 그리스의 폴리스(polis)에서 지원을 했고, 이는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정벌을 야기한다. 이것이 페르시아 전쟁이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폭풍우에 페르시아 선단이 좌초되고, 마라톤 평원 전투에서 그리스 중장보병에 격퇴당함으로써 페르시아 군의 패배로 끝났다. 다리우스 1세에 이어 제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명성에 걸맞은 제왕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선왕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달성하고자 한다. 그것이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며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라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과 <300>의 무대가 되는 테르모필레 전투의 원형이다.
<300>은 역사란 원석을 허구의 보석으로 가공하고자 한 심산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고대의 역사는 구전을 바탕으로 한 기록으로 전승되는 것이 대부분이라 그 기록 자체도 얼마나 많은 허구로 채워져 있을 것인가를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프랭크 밀러가 ‘300’의 창작에 참고하기도 한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페르시아군의 수를 260만으로 묘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고대 역사의 기록들이 신화적 과장을 짙게 드리운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서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긴 힘들다. 결국 고대의 역사는 확정지을 수 없는 확률의 고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과장된 역사적 기반들은 때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서술에 이런 민족적 감정이 은연중에나마 포함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역사를 기반으로 프랭크 밀러가 완성한 ‘300’이란 에너지의 골격은 잭 스나이더를 통해 생동감의 육신을 부여받았다. <300>은 마땅히 극의 쾌감을 위해 역사적 고증이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인 셈이다. 애초에 실사 톤에서 다운된 색채감의 풍광 자체만으로도 <300>은 이미 현실에서 탈피한 세계다. <씬시티>에서도 구현된 프랭크 밀러식의 세계관은 <300>에도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무엇보다 원색에 가까운 핏빛의 폭력적 이미지즘이 잿빛 도시의 비정함에서 근육질 골격의 마초성으로 옮겨갔을 뿐 원시적 강렬함에 충실한 건 여전하다. 음양의 대비가 강렬히 드러나는 낮은 채도의 풍광은 <300>에 자리한 테르모필레 협곡의 드센 마초들이 역사와 신화의 중간계에서 관객과의 정서적 괴리감을 조장하고 있음을 극명히 한다.
더군다나 그런 사실을 전혀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영화의 모양새가 더더욱 그러하다. 환락적 기운이 뿜어 나오는 신탁녀와 크세르크세스의 막사 내부에 대한 묘사는 그 세계가 지닌 비정상적 기운을 뿜어내는 출구다. 또한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흉측하게 변모한 육체의 카니발은 비틀린 파괴적 본능의 오르가슴을 느끼게 한다. 결국 <300>은 관객에게 역사관의 증명을 꾀하는 작업이라기 보단 과거적 사실이 담고 있는 기운을 추출해 비현실의 대지위에 빙의시키는 작업인 셈이다. 실제 스파르타 군이 전쟁 당시 금속 재질의 갑옷을 입었다는 사실과 전투 중에 망토를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300>을 통해 반대로 구현된다. 조각 같은 스파르타군의 강인한 근육질 육체를 드러냄으로써 스파르타인 개개인이 뿜어내는 가공할 전투적 생명력이 극대화되고 실제 전쟁 중에 착용하지 않았다는 붉은 망토를 걸침으로써 그들의 육중한 몸놀림을 우아하고 화려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300>은 확실히 위험한 구석이 있다. 그건 선악의 구도처럼 보이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진영의 관계도 때문이다. 인구의 70%가 노예였으며 나머지 30%는 지배계층으로 이뤄진 국가였던 스파르타가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강력한 군국적 기반을 필요로 했음은 당연하며, 강인한 육체에 대한 맹신은 그런 반석위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린 풍토였다. 우수한 종자로 판명되지 못한 태아를 가차 없이 유기하는 잔인한 성향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배신자 에피알테스에게 기형적 신체를 씌움으로써 은닉자의 상을 만들어낸 것도 그런 사실을 밑천으로 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레오니다스 왕이 국가의 존립을 위해 진영의 최우선에 앞장서서 싸우는 모습은 전사로써의 자긍심을 넘어 지도자의 미덕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실현처럼도 여겨진다. 하지만 수많은 종자들이 떠안는 거대한 가마 위에 홀로 우뚝 서서 전투를 지켜보는 중성적인 페르시아의 제왕 크세르크세스의 이미지가 오버랩될 때 이는 음흉한 목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또한 근육이 팽배한 스파르타 인들의 건강한 육체에 비해 페르시아 군들은 그로테스크함 자체다. 배리 스트라우스의 ‘살라미스 해전’에 의하면 “스파르타군과 비교하면 이들(페르시아군)의 차림새는 전장이 아닌 어디 열병장에라도 나가는 모습이었다.”라며 양 진영을 묘사한다.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장창과 방패를 이용해 막강한 방진(phanlax)을 형성하며 전술의 탄탄함을 지녔던 것에 실제 보병과 기마병 위주로 이뤄진 페르시아 군은 숫자적 우위에 놓여 있었을 뿐 개별적으론 열악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300>은 단순히 스파르타 군의 전술적인 혹은 전투적인 능력 이상으로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결국 이는 힘의 우열을 통한 결과적 승패를 묘사하는 수순을 넘어 옳고 그름, 즉 어느 진영에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로 둔갑한다. 강한 스파르타 인들의 강대한 기골만큼이나 굳건한 애국심이 자유의지에 대한 대의적 명분으로 치환되어 이해될 수 있단 사실은 스파르타인의 파시즘적 정서가 먼저 와 닿는 이에겐 분명 우려할만한 사실로 인식될만한 것인 셈이다.
하지만 <300>은 영화라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의 문제라기 보단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객체, 즉 관객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 안의 현상을 이해하고 있는가 혹은 모른 채 받아들이게 되는가의 문제다. <300>을 통해 추측되고 예상되는 모든 결과적 효과들은 생산자의 의도보단 소비자의 해석 속에서 읽혀지는 콘텐츠들이다. 프랭크 밀러가 <300>을 창작하며 이런 역사적 진실들에 무지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300>을 스파르타 전사들을 위한 기념비로 새겨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역사가 아닌 허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 오해될 수 있는 허구는 위험하다. 하지만 ‘300’의 정서는 스파르타에 대한 찬사이기 전에 마초들의 에너지 방출이며 민족적 우열나누기 이전에 소수의 결연한 의지이다. 결국 <300>은 서구의 동양에 대한 무지한 시선이라고 이해될만한 산물은 아니다. 역사라는 산물을 도구로 프랭크 밀러라는 캔버스에 그려낸 허구의 집약체다. 실사가 아닌 블루 스크린을 등에 업고 완성된 영상부터 역사에서 추출한 정서를 극대화시킨 세계관까지, 그 모든 것이 인위적인 상상과 기술로 구현된 총아인 셈이다. 그런 <300>에 현실의 가치관을 대입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런 측면에서 <300>의 테르모필레 협곡을 목격한 이들에게 당부할만한 사실은 영화 속 현상을 인위적인 가치관에 강박적으로 결부 짓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프랭크 밀러의 ‘300’은 창조적인 마인드로 빚어진 신세계이며, 그를 토대로 태어난 잭 스나이더의 <300>은 극대화된 영상미학이다. 블루 스크린과 컴퓨터를 이용해 만들어 낸 거짓 영상은 실사보다 박진감 넘치는 질감의 생명력을 선사한다. 스크린의 장벽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질 사내들의 진군이 2시간 분량의 각개격파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건 그 영상에 노력을 투자한 창작자들의 의도와도 맞물리는 일이 될 것이다. 국가적 위신과 민족적 우열을 염두에 둔 제작의도에 의심을 던지는 소모적 분쟁만큼이나 단면적인 정서를 먼저 받아들이고 경이로운 화면빨에 도취되는 것도 중요하다. 페르시아와 스파르타를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종 갈등의 장으로 이해하고 작품을 폄하하는 것보단 잠재된 파시즘을 경계하고 서양 우월주의의 무의식적인 잠식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논쟁은 필요하지만 과잉된 해석과 본의도를 간과하는 폄하는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사활을 건 스파르타인의 전투를 목도한 관객들이 머리끄덩이를 잡으며 설전을 벌이는 것에 스크린 너머의 당사자들은 심드렁하지 않을까?
2007년 4월 2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