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필자는 트로트가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한 단계 나아가자면 트로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지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취향의 차이로 무관심하다는 것이 죄악은 아니므로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취향의 문제가 비단 필자만의 사연은 아니리라 믿는다.
현재 젊은 세대, 즉 10대와 20대 안에 속한 이들에게 트로트라는 음악이 크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엄연히 시대착오적 정서임을 확실히 믿는 바이다. 이 영화는 그런 시대착오적 정서를 스크린에 들이민다. 스크린 안의 무대는 트로트 가수들로 메워지고 그들은 관객의 환호 속에서 무대를 휘젓는다. 그렇다고 그곳이 트로트 가수들의 전성기인 쌍팔년도의 풍경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 이상한 현상은 이 영화가 설정한 허구적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락커를 꿈꾸는 달호에게 극은 트로트를 제시한다. 간
지나는 레이어드 룩과 장발 대신 반짝이 의상과 2 대 8 가르마가 달호를 대체할 때 발견되는 것은 웃음이다. 그렇다. 이 영화의 본질은 바로 그 웃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웃음보다는 빗나간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사실 복면달호는 한마디로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사건은 너무나도 간단히 진행되고 이야기의 과정은 고단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에누리 없는 상황들. 무엇보다도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캐릭터들에 대한 무성의함이다. 극에서 달호와 대립되
는 상대인 나태송(이병준)이나 태준아(선우)가 웃음의 소스로 나열되고, 정작 극의 긴장감에 일조하지 못하는 것이나 달호와 로맨스를 형성하며 극적 감성의 키를 쥔 듯한 차서연(이소연)이 극의 흐름에 묻혀버리는 것은 플롯의 공백으로 인한 극의 망각과도 같다. 무엇보다도 사연이 있을법한 장준(임채무)의 이야기는 정체를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극적인 높낮이 조절을 생성하지도 못하고 간단하게 그 결과물들을 들이민다. 결국 관객들은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그 상황들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맛있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달호라는 캐릭터를 통해 빚어지는 면이다. 락의 꿈을 품고 상경하는 달호가 트로트에 발목이 잡히는 순간 극의 계기가 조악하다는 것이 발견된다. 하지만 그 순간 달호의 무지한 성향이 순박함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이야기의 열악함이 감성적 취향의 지원을 받는 셈이다. 동정심을 부르는 캐릭터는 의도하지 않던 복면에 횡재수를 터뜨리고 그 복면의 행운을 받아들이는 천박한 근성까지도 드러낸다. 자신의 장르에 대한 고민보다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즐기던 캐릭터가 고민을 안게 되는 순간 성장과 자각이라는 공식을 발견한다.
이는 ‘미녀는 괴로워’와 비슷한 코드인데 성형을 통해 외면적 행복을 섭렵하지만 내면의 괴리감을 느끼던 한나와 마찬가지로 달호는 복면을 뒤집어 쓴 봉필의 외면과 복면을 벗은 내면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노래하는 삶을 위해 성형을 감행해야 하는 한나와 우연찮게 굴러온 인기를 위해 복면을 고수해야 하는 달호의 모습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복면을 벗어던지며 심정을 토로하는 달호의 그것은 성형사실을 커밍아웃하는 한나와 맞닿으며 비슷한 동정심을 유발한다. 이는 분명 이 영화의 열악한 증거와 구별되는 비의도적 호감일지도 모른다. 마치 달호의 복면이 의외의 대박을 쥐어주듯.
무엇보다도 극에서 흐르는 ‘이차선다리’는 맛있다. 물론 필자는 여전히 트로트가 맛있는 음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노래는 다시 듣고 싶을 정도로 맛있다. 이는 트로트라는 촌스러운 장르가 감성적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몰인정한 기획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연애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비해 인간미가 넘치는 그들의 모습은 훈훈하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열악한 이야기를 눈감아주고 싶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반짝이 의상의 촌스러운 트로트가 땡기진 않아도 밉지 않은 것처럼.
2007년 2월 14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
제작자 이경규 인터뷰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