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정교한 제단을 쌓고, 그 나름의 문자를 사용할 만큼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였지만, 이제는 멸망하고 없는, 미스터리한 문명. 최초 발굴 이후 수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연구중인 고대 중남미 번창의 흔적, 마야 문명.
멜 깁슨의 네 번째 연출작 <아포칼립토>는 바로 이 마야문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보는 관객마저 고통스러웠다는 점에서) 수난극의 진수를 선보였던 멜 깁슨. 그가 이번엔 하나의 문명이 어떻게 스러지게 되었는가를 액션활극의 모양새 안에 담아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야어가 영화 속을 지배하고, 사냥과 몬도가네, 부족간의 전쟁, 인신공양, 그리고 인간사냥의 잔혹한 스펙터클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관객에게는 딱히 눈 돌릴 틈도 별로 없다. 시종일관 뛰고 달리는 주인공과 함께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간을 졸일 뿐이다. 비교적 저예산에 속하는 4천만 불로 만든 영화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수준의 스펙터클과 완성도는 관객의 몰입도를 한껏 높인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을까? 그는 과연 가족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안고 주인공과 함께 달리다 보면 137분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재미있다는 얘기다. 근래 만났던 액션활극 중에 이만한 긴박감을 제공하는 영화도 흔치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영화는 위험하다.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사건과 액션은 긴장감이 넘치고, 몬도가네와 인신공양, 그리고 인간사냥으로 이어지는 잔혹한 영상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 되어 관객의 숨통을 조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미개의 부족간 전투가 아니라 마야문명을 그렸다는 점에서 멜 깁슨의 영화 <아포칼립토>는 위험하다. 그리고 오만하다.
먼저 주목할 점은 배경인 마야문명에 대한 안일한 묘사다. 문명이 형성되기엔 부적합하다고 알려진 정글 속에 세워진 마야문명은 도시국가를 형성, 권력을 세분화하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었으며,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할 정도로 발전된 문명형태였건만, 영화 <아포칼립토> 안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이란 고작해야 몬도가네식 생식에, 인신공양이나 일삼는 미개 부족의 일면이다.
서구 현대인인 감독의 눈은 다층적 문명형태였던 마야의 흔적을 평화를 사랑하는 주인공과 폭력적 거대부족으로 이분화한 뒤, 가족애를 위해 봉사하는 주인공에게만 머리를 주었다.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거대부족이 하는 짓이라곤 발달된 문명과 상관없이 개기일식에 두려워하고 인신공양에 열광하는 비합리적 행각들뿐이다. 맹신과 복수심, 폭력성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들이 어떻게 그 엄청난 제단을 쌓는 수학적 과제를 수행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에게는 ‘사고력의 흔적’이 도무지 존재치 않는다. 그러나 이쯤에서 그쳤다면 이런 안일한 묘사는 액션활극을 위한 서구인 감독의 편의주의 정도로 참아줄 수도 있었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인간을 경시하는 거대문명에 경종을 울린다’는 세간의 다소 넘치는 호평-대체 왜 그런 걸 고대문명에 비유해서 찾나? 현대에도 널리고 널린 소재인 것을.-도 인정할 수 있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있었다. "위대한 문명은 정복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붕괴하기 전에는(A great civilization is not conquered from without until it has destroyed itself from within.)."이라는, 역사가 뒤란트의 경구로 시작한 영화는, 신대륙을 향해 다가오는 스페인 거함들의 모습으로 끝난다. 사라지고 없는 고대의 문명을 그리면서 이 같은 언어와 묘사를 넣는다는 것은, 그 문명이 스스로 붕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내내 부족간 전쟁과 인간사냥을 보여주더니, 그 고색창연했던 문명이 스스로 붕괴했다고?
물론 마야문명이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내란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슬쩍 묘사됐던, 역사적으로 알려진 스페인 군대의 침입은? 그들이 휘두른 총칼은? 그들이 저지른 강탈행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됐던 문화유산에 대한 그들의 책임은? 그리고 무엇보다 남미 문명을 절멸로 몰아간, 스페인 군대가 옮겨다 준 매독균 창궐의 문제는? 몽땅 별 것 아니고 그저 스스로 붕괴했기 때문에 정복당한 거라고? 게다가 영화 속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추격자들을 몰아내준 고마운 사람들로 스페인 군대가 생각될 판이니, 아무리 역사의 묘사가 관점에 따라 각양각색이 될 수 있다지만, 이런 식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유포하는 것은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닌가. 고의라면 뻔뻔하고 몰랐다면 무식하다. 게다가 액션활극을 표방해 놓고 한 문명에 대해 이토록 중상모략을 일삼다니, 이건 반칙이다. 영화적 재미와는 별개로 이 영화 <아포칼립토>가 전혀 반갑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년 전,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비극적 결말에 대해, 케빈 코스트너는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로 나름의 설명을 보탠 적이 있다. 그들도 나름의 분열을 겪었고, 당시에도 사냥하려는 부족과 사냥당하는 부족 간의 전쟁은 묘사됐다. 그리고 그런 지리멸렬한 과정 끝에 백인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됐다는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슬프디 슬픈 전설. 그나마 그때는 반성적이랍시고 백인들의 학살을 묘사하기도 했었건만, 15년이 지난 뒤 멜 깁슨은 아예 한 문명의 몰락에 관여했던 서구인들의 대활약은 쏙 빼놓은 채 문명파탄의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만 있었다고 강변한다. 예나 지금이나 타자를 대하는 소위 양심적인 척 하는 서구인들의 시선이란 얼마나 지리멸렬한지,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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