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옥이 홍콩특유의 화려함과 격조를 상징한다면 공리는 중국특유의 강인함과 우아한 이미지다. 물론 이 두 배우에게는 공통적으로 대륙의 풍모와 깊이가 내재되어 있다. 홍콩과 중국본토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는 90년대를 풍미했던 두 여배우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어 중국영화(홍콩과 중국본토영화 통합)는 거대한 낭만성을 획득했다. 장이모우의 <집으로 가는 길>로 장쯔이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을 때, 아직 그에겐 격조 있는 화려함도 강인한 우아함도 없었다. 단순히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대륙의 비밀스러운 순진함만이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담백한 수식어정도라고 할까.
<영웅> <연인>을 거치면서 장쯔이는 그만의 순진함에 대륙의 깊이와 풍모 더불어 화려한 격조와 강인한 우아함을 덧입게 된다. 비밀스러운 그의 순진함은 마치 스펀지 같아, 서구 사회가 아시아의 여배우들에게 원하는 그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게 된 것이다.
기회 앞에서 누구나 다 평등하다, 라고 말하는 그에게 현재 중국 블록버스터영화를 독식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비난은 속된 말로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급변하는 중국 현실에 장쯔이는 가장 빨리 적응했을 뿐이다. 중국 국민들이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애증’에 가까울 것이다.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머쥔 중국을 대표하는 톱스타로서의 부와 명예는 질투를 야기한다. 90%이상 극빈층으로 사는 중국국민에게 장쯔이는 따라가고 싶은 신기루로, 기의를 상실한 기표다. 반대로 아시아의 중심이라는 자긍심은 해외에서 더 주목받고 있는 장쯔이를 그들을 대표하는 가면으로 내세운다. 이렇듯 중국의 야누스적인 현실이 지금의 장쯔이다.
반일 감정이 심한 중국인들의 비난을 무시한 체 일본 거장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할리우드에서 게이샤로 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는 그 모든 속박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드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더 이상 중국을 대표하는 배우 혹은 스타로만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장쯔이 스스로 발견한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그는 수많은 영화관계자, 해외언론을 상대하면서 중국배우가 아닌 세계적 배우로 성공하고 싶은 자신을 독려했다. 대륙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유의 호방함은 자본주의 시장의 무한한 기회제공력 앞에서 폭 넓은 안목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한화로 200억이 투자된 대하무협멜로 <야연>은, 장이모우 <연인>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의 매력을, 왕가위의 <2046>에서도 끌어내지 못한 장쯔이의 현재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켰다. 장쯔이가 연기한 황후 완은 욕망과 탐욕 그리고 처연한 사랑을 하는 극도로 복잡하고 화려한 인물이다. 황후 완은 장쯔이가 처한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활동영역을 해외로 넓힐수록 장쯔이의 야망은 그에 비례해 커져 갔을 것이다.
<야연>은 장쯔이가 그 야망을 충촉시키는 영리한 선택을 했음을 증명한다. 중국인을 대표한다는 자긍심을 장쯔이는 황후 완의 화려함으로 포장하고, 그 화려함은 서양인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마다하지 않는다는 매혹으로 비쳐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탐욕과 사랑에 번뇌하는 황후 완의 캐럭터 성격만큼은, 동양의 신비와는 다소 먼, 현대적인 여성의 그것에 닿아 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든 아니면 현실을 배경으로 하든 혹은, 중국영화나 해외영화이던지 간에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캐릭터를 장쯔이는 <야연>을 통해 만들어 낸 거다. 상호 원하는 것을 고르게 취합한 모습의 황후 완은 주어진 현실에만 충실하다는 장쯔이에게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기회와 성장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장쯔이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비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서고 싶은 그의 야망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쓰인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쪽으로 말이다.
취재/글_ 2006년 9월 23일 토요일 | 최경희 기자
사진_ 권영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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