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퍼즐>은 새로울 게 없는 영화다. 강탈영화의 젼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다 쿠엔티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이 익숙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관객이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두뇌유희프로젝트가 두뇌휴식프로젝트로 오작동 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퍼즐>이 실망스러웠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눈에 익어서 그렇지 다섯 명의 주인공들의 과거는 그들이 처해있는 현 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인물의 과거뿐만 아니라 사건의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퍼즐>에서 또한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 효과적인 분배는 아니었다고 봐도 관객들에게 단서를 주려는 플래시백은 자신들이 제시한 두뇌유희를 충실하게 따라가려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 프로젝트(범죄)가 틀어졌을까? 어디서부터 이 프로젝트(영화)가 긴장감과 흥미를 잃기 시작했을까? 환(문성근), 류(주진모), 노(홍석천), 정(김현성), 규(박준석), 이들 다섯 명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 지점부터 영화는 느슨해진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도처에 산재된 단서들은 완벽범죄의 결정적 동기가 되지 못한다. 겉만 번지르르했던 캐릭터의 성격과 특징들은, 사건과의 핵심적인 연광성이 그다지 없어 보인다. 때문에 최소한의 두뇌유희에 참여하고픈 능동적인 관객은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해 그들을 둘러싼 모든 환경(배경)에 집중한다. 결국 이 약간의 노력에 범인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킨다.
엄격히 따져, 영화 <퍼즐>은 두뇌유희가 아니라 숨은그림찾기였던 것이다. 범인이 등장하는 마지막 반전까지 가기도 전에 영화의 정체가 밝혀지자 강탈영화의 골격은 무너진다. 허우대 좋은 구조는 카피본임이 판명된다. 장르컨벤션을 정석대로 밟아간 것은 기본적인 응용에서 멈춰버렸다. 물론, 어디까지나 능동적인 관객에 한해서다. 본다는 개념만 있는 이에게 두뇌유희 프로젝트는 참여유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다섯 남자의 넘실대는 욕망을 말초적인 빛과 구도로 잡아낸 카메라 기법은 흡족하다. 홍석천의 느글거리는 연기 또한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장점은 반전의 충격을 보강시켜 주지 못한다. 진범X가 밝혀지기에 앞서 영화의 정체는 꼭꼭 숨겨둘 필요가 있었는데 <퍼즐>은 반전을 위한다시고 너무 많은 실수들을 도처에 남겼다. 더 실망스러운 점은 영화가 자신들의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깨닫지 못했다는 거다.
글_ 2006년 9월 7일 목요일 | 최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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