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평생 외국어와 담쌓고 지낸 세월을 망각한 채 괴나리봇짐 싸고 바다을 건너 도착한 일본 하네다 공항엔 먹구름 사이로 붉은 태양이 땅거미를 깔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 여긴 일본이야~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이 끝나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의 찌든 때를 차곡차곡 쌓겠지만 일본에 있는 기간 동안 특종이면 특종! 건강이면 건강! 을 제대로 챙겨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야!라고 굳게 결심했었더랬다. 다부지게 맘먹고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고 내일 만날 그들을 떠올렸다. 멋쟁이 조지 클루니를 내 가슴에 안긴 <퍼펙트 스톰>과 브래드 피트의 황금빛 근육의 떨림을 전해준 <트로이>의 볼프강 패터슨 감독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시차 없는 동경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볼프강 패터슨의 2006년 거대신작 <포세이돈>은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년)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그 규모면에서 원작을 능가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급유람선 포세이돈이 바다의 뜻 모를 분노, 쓰나미를 만나 침몰되는 순간 배 안에 탄 인간 군상들의 각양각색 반응과 삶의 의지는 블록버스터가 놓치기 쉬운 인간미마저 내포해 감동을 선사한다.
드디어 동경의 날이 밝고 지하철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때 록본기 하얏트 호텔의 넓은 접대실에서 <포세이돈>의 감독과 배우를 만났다.
사실, 할리우드의 대감독을 만나 인터뷰 한다는 것은 영화를 업으로 살고 있는 기자에게도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닐뿐더러 떨리는 만남이다. 거기다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는 것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특별한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볼프강 패터슨은 <포세이돈>이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영화가 내세우는 비주얼에 먼저 압도된다는 점에서 그의 의견에 쉽게 수긍하질 못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물’이다. 그러나 물을 적으로 돌린 주인공들의 사투는 계급과 인종 성별을 떠나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패터슨 감독은 약간의 논란의 소지를 보인 영화 속 인종 문제에 대해 먼저 언급해 직접적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들어준다. <포세이돈>을 한국에서 미리 본 기자들은 백인우월주의 혹은 미국우월주의가 영화 안에 암암리에 녹아 있다고 평했다. 패터슨 감독은 마치 한국의 평가를 미리 알고 있다는 듯....
“기존의 영웅주의가 이 영화 안에는 없다. 주인공 조쉬 루카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그는 타인을 배려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위기에 처하자 그는 변했을 뿐이고 성숙한 인물로 거듭날 뿐이다”
감독은 분명한 어조로 영화에 얽힌 오해를 풀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명쾌한 해명이 될 수 없다. 일본까지 왔는데 여기서 쉽게 물러나면 안 된다고 다들 굳게 다짐이라도 했는지 같이 간 한국기자들은 끈덕지게 감독의 말꼬리를 잡고 도통 놓아 줄 생각을 안 한다. 물론, 무비스트도 여기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들 질문할 때 귀 활짝 열고 또박또박 그들의 말을 노트에 장황하게 적어 내려갔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힌다. 외국어를 못한다는 게 이렇게 쪽팔린 순간을 만들지는 진정 몰랐다.
“리차드(리차드 드레이퍼스)는 영화초반에 동성애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배가 쓰나미에 뒤집힌 후로는 그의 동성애적인 이야기는 전개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급박한 상황인데 한 개인의 성정체성과 그에 관련한 미묘한 감정변화를 다루기는 어려웠다고 본다”
감독 말을 정리하자면 <포세이돈>은 인종과 계급의 문제를 떠나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위험천만한 재해 앞에서도 훼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볼프강 패터슨은 <특전 U보트>(1981년)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이 영화에서 그는 전쟁의 공포와 인간의 추악한 양면성을 동시에 다뤄 큰 호평을 받았다. 그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 온 패터슨은 그의 장기를 살려 재난 앞에서 숭고한 인간애를 스펙터클하게 담아내면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나갔다.
“나이가 드니깐 사람이 변하더라. <특전U보트>를 만들 당시에는 아직 2차 대전의 상처가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면에서 사람이 유해졌다. 한마디로 인생의 맛을 알아가면서 상황에 상처받고 좌절하는 인간보다 그걸 극복하는 인간승리를 내 영화 속에 담게 됐다.”
볼프강 패터슨 감독은 초반의 영화색깔과 지금의 영화색깔이 달라졌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 좋은 질문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주어진 인터뷰 시간을 흐뭇하게 보내다 우리와 이별했다. 아! 저 질문을 본 기자가 했어야 하는데 땅을 치며 후회한 순간 그렇게 시간은 끝나버렸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볼프강 패터슨 감독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 본 순간 특종의 꿈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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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_최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