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백화점 화장실에서 우연히(?) 목격한 아동폭행. 그 여자는 아이를 때리는 의붓어미를 가느다란 송곳 비슷한 것으로 무참하게 난도질해 죽여 버린다. 잔혹한 살해 장면의 잔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가운데 살인자는 ‘오로라공주’ 스티커만 범행 장소에 남겨둔 채, 다음 살해 장소로 빠르게 이동한다.
(첫 번째) 살인과 (두 번째) 살인 사이에서 명확한 동기와 분위기 조성도 없이 다섯 번째 살인까지 순식간에 해치운 영화는 스릴러 장르의 단점이 미흡한 드라마인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범인 ‘정순정’(엄정화)의 감정과 살인의 곡절을 꽤나 진중한 드라마로 풀어낸다.
여배우 출신 감독인 방은진의 <오로라공주>는 ‘살인’에 방점을 찍기보다 한 여성의 내면의 파장을 확장해 영화 전체를 가로지르는 살인의 ‘동기’를 역으로 끌어내는 구조로, 보편적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배반한다. 살인자의 정체를 처음부터 드러낸 과감한 시도 또한 장르의 배반 중 하나 일 것이다. 이로 인해 영화는 연속적인 살인 장면을 연출함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상실한다.
이 용감한 시도가 무모한 시도로 여겨질 때, 카메라는 모든 미장센을 포기하듯 범인 ‘정순정’에 집착한다. 그녀의 트라우마가 서서히 형체를 갖출수록 스쳐지나간 피해자들의 입체성도 살아난다. 방금 전에 정순정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려는 의도적 장치는 사실 영화 안에 따로 없다. 그런데도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범인의 행적을 정면으로 집요하게 쳐다보는 전체적인 연출스타일 때문이다.
즉, 카메라가 살인자와 범행 동기를 극 중반까지 완전 노출함으로써 영화는 미스터리를 제껴(포기)버린다. 대신, 살해된 어린 딸에의 복수를 감행하는 정순정의 ‘분노’에 초점을 맞춰 모든 사건과 영화적 장치들을 차례차례 등장시킨다.
결국, 주인공의 내면이 가시적 이미지로 구체화될수록 관객들은 긴장감보단 살인에 동참하는 동료의식을 얻어낸다. 이걸 토대로 스릴러라는 외피는 자연스럽게 벗어던지면서 드라마가 극의 주조를 이룬다. 여기서 얻어낸 복수의 타당성과 새끼를 잃은 어미의 슬픔이 플래시백으로 인해 일종의 ‘죄책감’으로 전이되는 순간, 준비된 ‘반전’은 적절한 타이밍을 장식한다.
살인의 동기와 캐릭터 설정만 보자면 <오로라공주>는 ‘여성’영화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수를 내포한 작품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방은진’ 감독은 도시에 살면서 그 도시의 음험함에 몸을 숨기는 현대인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모성을 응징의 보편적 ‘잣대’로 드리워 상업영화로서 안착하는 길을 택했다.
정순정의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에서 또한 방은진 감독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살인의 ‘동기’로써의 모성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장르영화의 규칙을 과감히 어기거나 적절히 지켜가면서 얻어낸 상업적 ‘재미’는 사실, 감독이 영화적으로 대단한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살인자와 형사 간의 추적과 대결이 겉돌았다는 점에서 영화가 내세운 스릴러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게 드러난다. 드라마의 부각은 ‘정순정’의 살인 행각에 무게감을 실어주지만 상반되는 두 개의 장르가 어느 한쪽에 귀속되지 못한 채, 마찰을 일으키고 있음을 노출시키는 약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흐름과 감정의 전달에만 급급해 스릴러와 드라마의 효과적인 융합을 실험해보지 않은, <오로라공주>는 방은진 감독의 문제적 데뷔작으로 평가받지 못할 듯하다. 반대로 정순정을 연기한 ‘엄정화’에겐 배우로서의 터닝 포인트적인 작품으로 작용할 것이다. 감독과 배우의 차이는 이런 거다.